오피니언 > 독자기고

(김용필/그리스.터키 역사기행)

“이스탄블에서 제국의 탄생과 종말을 본다”

기사입력 2015-05-12 오전 7:44:31 입력
페이스북 트위터

(김용필/그리스.터키 역사기행)
“이스탄블에서 제국의 탄생과 종말을 본다”



1. 東西文化의 충돌과 화합의 이스탄불

 

 

김형!

내가 이스탄불을 찾은 것은 동서 문화의 충돌과 화합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내면서 숫한 종교와 인종의 갈등으로 수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당당한 제국으로 거듭났던 이스탄불의 역사를 탐색하기 위함입니다.

 

수세기 동안 많은 국가가 망하고 태어나는 이합집산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뿌리 깊은 그리스 문화와 로마문명이 오스만에 의해서 동양문화와 완충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스탄불은 마케도니아의 헬레니즘 문화와 비잔티움 제국으로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제국도 11세기에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을 받았고 13세기에는 십자군에게 약탈당해 쇠퇴기를 맞더니 14세기에 북으로는 세르비아, 소아시아의 오스만 제국, 이탈리아의 공화국에 위협을 받아 휘청대다가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더 찬란한 황금기를 맞았어요.

 

비잔티움은 서기 324년 동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데이아에서 보스포러스 해협의 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으로 천도하여 만든 나라로 ‘동로마제국’이라 불렀다.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쓰는 그리스인으로 서기 330년부터 1453년까지 1123년 동안 존속했던 대제국이었다.

 

그 영토가 얼마나 되었느냐고요?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 국가로 구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를 통일 하였고 터키, 중동으로 진출 하였지요.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에게 해의 무역 중심지로 자리 잡고 전 세계 부의 3분의2가 모였던 부강한 나라였지요.

 

김형!

역사는 바뀐다는 진리 앞에 영원한 제국은 없던가요?

 

융성한 비잔티움 제국도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의 침략을 받아 영토를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10세기 말에 마케도니아의 황조가 국력을 회복하여 동지중해의 패권국이 되어 파티마 왕조와 대결하였으나 1071년 제국의 심장부인 소아시아 대부분을 셀주크 투르크 세력에게 잃었고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 하였으나 제국은 점점 쇠퇴기로 접어들어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제국의 영토는 비잔티움 그리스인과 라틴인의 각축장이 되었지요.

 

1261년에 팔라이올로고스 황제가 정권을 탈취하여 제국을 재건했으나 14세기 후반 내전을 거듭하다가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고 비잔티움 제국은 완전히 멸망을 하였습니다.

 

김형!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탄지 11시간 만에 터키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였어요.

 

이제 본격적인 터키. 그리스 역사문화 기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노을이 물드는 시각에 이스탄불의 쿠르즈 터미널로 가서 보스포러스 해역을 유람하는 관광 쿠르즈를 탑니다. 쿠르즈에 올라 보스포러스 해역 관광이 시작됩니다. 보스포러스는 이스탄불을 동서로 나누어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는 해역입니다. 동쪽의 이스탄불은 구도시. 신도시로 나누고 서쪽은 아시아로 개발이 한참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이스탄불은 1,200만의 터키의 경제문화의 중심도시로 동서 문화와 종교 역사가 집약 충돌하고 화합하는 지구촌 역사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만큼 엄청난 사료가 묻혀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인 흑해, 보스포루스 해. 마르마다 해, 다르다넬스 해, 에게 해로 접하는 해양문화의 요충지이며 옛부터 베네치아와 쌍벽을 이룬 해양문화가 발달한 도시지요. 이곳은 서양과 동양이 걸처있고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 도시 국가에서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 헬레니즘 문화를 번성시켰고 로마에서 신성 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김형!

보스포러스 해역에서 슬픈 전쟁사를 봅니다.

 

이스탄불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쿠르즈를 타고 보스포러스 해를 돌아보는 것이 최고였어요. 동서 문화와 해양 도시 문화가 이룬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요. 보스포러스 대교가 동서로 가로놓여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환상적인 경관을 볼 수 있고요. 쿠르즈는 천천히 보스포러스 대교 쪽으로 물살을 가릅니다.

 

이 해역은 숫한 전쟁의 비극을 안은 해역입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정복을 나갔던 곳이며 십자군의 8차 전쟁과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 확장 전쟁등 수많은 전쟁을 치렀던 해협입니다. 멀리 도시 해안을 둘러싼 로마의 성벽에서 콘스탄틴노플의 최후의 순간을 회상합니다. 한순간에 철옹성이 무너지면서 비잔티움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지배를 받게 되고 카톨릭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는 ‘동로마 최후의 날’이 되고 만 것입니다.

 

김형!

잘 키운 첩자 한명이 백만 대군 보다 낫다고 했던가요?

 

오스만의 마호메트 2세(1451-1488)가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를 무너뜨리고 대제국을 만들었던 날이 비잔티움 최후의 날이지요. 오스만 터키가 로마의 해안 철성벽을 함포 한방으로 무너뜨림으로 비잔티움은 망했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자국의 재상이 첩자 질로 망했답니다.

 

1453년 오스만의 마호메트 2세(술탄)가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보스포러스 해안 으로 접근하여 함포 한방을 동로마 콘스탄틴노풀의 안테미우스 성벽을 향하여 쏘았다. 순간 난공불락의 안테미우스 성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무너진 성벽으로 30만 대군이 일제공격으로 콘스탄틴노풀을 점령해 버렸다.

 

바로 반역자의 농간이 부른 화입니다. 콘스탄틴 대제의 재상인 루카스노티라스가 오스만의 아들 메르메트 2세 술탄의 황금 공세에 넘어가서 취약점을 알려준 결과였다. 성벽에 해안으로 통하는 비상구가 있었는데 술탄이 바로 이 비상구에 함포를 쏘아서 무너뜨렸다. 탐욕이 나라를 망친 결과를 자아냈다.

 

그런데 메르메트 2세는 강력한 함포를 어디서 구했을까? 아이러니한 역사의 꼬임이었다. 헝가리의 무기상 모오가 화포를 만들 화약을 가지고 콘스탄틴 대제에게로 갔다.

 

“이 화약은 한 개의 성을 무너뜨릴 위력을 가진 화약입니다. 사세요.”

라고 요청했다.

“이스탄불은 백만 대군 이 쳐들어와서 무너지지 않은 철옹성을 자지고 있소이다.”

대제는 거절했다.

“이슬람이 로마를 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함포를 만들어 대비하십시오.”

그래도 거절을 당했다.

이 소식을 비잔티움 재상이 오스만의 술탄인 메르메트 2세에게 알려줬다. 술탄은 당장 헝가리 무역상 모오를 불렀다.

“내가 그 화약을 사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화약으로 화포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겠니?”

“물론입니다. 화포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그렇게 화포를 만들어 철옹성을 무너뜨렸다. 무서운 화약이었다. 한방의 화포로이스탄불을 점령하였다. 마침내 1453년 5월 29일 콘스탄딘 대제가 손을 들었고 2000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오스만 술탄에게 망했다.

 

‘잘 키운 반역자가 100만의 군대를 이기고 한사람의 지도자가 나라의 운명을 바꾼다.’ 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듯합니다.

 

김형!

전쟁과 여인, 전쟁과 노예. 나라 없는 서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지요?

 

나라가 없으면 내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탄불 건물에 펄럭이는 빨간 터키 깃발이 있습니다. 터키인의 나라 사랑 정신이랍니다. 터키인은 선조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애국심을 기른답니다. 그래서 국기에 자부심 갖고 살지요.

 

나라 없는 서러움은 정복당한 백성만이 알 수 있지요. 역사상 전쟁에서 진 나라의 백성은 가혹하고 혹독한 고통을 당했어요. 전쟁은 승자에게도 고통이 따르지만 패전 국가의 백성과 군주는 노예로 끌려가고 여성들은 성폭력에 시달렸어요. 그래서 국가는 영토를 지켜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하는 사명감을 지녀야 합니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보스포러스 해역을 돌아보면서 숫한 전쟁의 역사 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김형!

보스포러스 해역에서 십자군이 174년 동안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카톨릭을 믿는 백성들을 학대 했어요. 로마 교황청은 이슬람 국가를 치려고 174년간의 지겨운 전쟁을 치렀어요. 이 전쟁에서 천만 명이 희생당했지요. 오늘날까지 이슬람과 기독교는 반목과 분쟁을 끝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오로지 피해만 남은 잔혹한 전쟁이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전쟁부터 제8차 십자군 전쟁까지 천만의 사상자를 냈지요.

 

1096년 로마 교황 리차드 1세는 에데사 장군을 앞세워 3만의 군대로 예루살렘 정복에 나섰다.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어져 분쟁하다가 십자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에데사는 정복한 예루살렘에 십자군 왕국을 세우고 이슬람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400만 명의 이슬람인이 학살당했다.

 

이때 수니파의 장기 장군이 시리아에서 지하드 깃발을 내세워 이슬람을 통일하고 십자군의 에데사 왕국에게 대항하였으나 불행하게 장기 장군이 에데사의 부하에게 살해당하면서 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장기장군의 아들 누르 알딘이 이슬람 부흥을 부르짖고 제2차 십자군 정벌 전쟁을 벌인다. 그는 에데사의 십자군 왕국을 함락하고 시리아에 투르크 왕국을 건설하였다.

 

교황 유기니우스 3세는 프랑스 왕 루이 7세를 내세워 3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지만 실패하다. 시리아 지도자 누르 알딘이 죽고 그 아들 알사이흐가 12살로 집권하지만 강력한 군주가 되어 수니파 시리아는 시아파 이집트를 점령하고 강력한 이슬람 연방 국가를 형성하면서 십자군은 기력을 잃고 맙니다.

 

김형!

십자군이 예루살렘 탈환하려고 십자군의 원정을 했을까요?

 

난 십자군 전쟁이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회복하려고 치룬 전쟁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천만에 말씀입니다. 자세히 알고보니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이란 미명아래 교황청의 권력 강화와 이권 확보와 영토 확장의 침략 전쟁이었어요.

 

십자군 내에서도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레콩기스타군이나 동방, 북방, 알비, 사이비 십자군이 침략군으로 활약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3차 십자군의 원정은 같은 카톨릭국인 비잔티움 제국을 치는 전쟁이었어요. 로마 카톨릭 십자군들이 비잔티움에서 동방 정교회 신자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바람에 정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어요.

 

이슬람에 동화된 교인들이라고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엄청나게 학살을 했답니다. 그들의 무례함은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십자군 기사들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더 심해지면서 1054년에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전쟁이 일어나 결국은 카톨릭은 분열하고 말았지요. 오늘날도 동방교와 카톨릭은 화합을 못하고 지냅니다.

 

김형!

보스포러스 해역을 돌아보면서 터키인들의 자존심이 이스탄불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것은 오스만 투르크 대제국을 만들었던 조상을 숭배하고 그 정신이 강한 애국심으로 나타났어요.

 

터키는 기원전 1700년 아나톨리아 왕조에서 6세기 아케베네스왕조, 4세기 마케도니아 알렌산더 대왕조를 지나 1세기 로마에 복속하였다가 AC 330년 콘스탄틴 대제가 이슴탐블에 동로마 제국을 건설하여 번창하였고 1243년 몽고가 패망하자 그 자리에 오스만 투르크가 성립하여 17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번창기를 맞았던 것입니다. 터키인은 그런 조상을 섬기는 민족입니다.

 

김형!

터키인들은 우리나라를 형제국이라고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같은 조상을 뒀다는 것입니다. 터키인은 동북아시아의 우리와 같은 흉노족의 자손입니다. 흉노가 고구려와 걸안국을 만들어 몽고 평원을 지배했는데 고구려와 같이 당나라에게 망했죠. 걸안은 멀리 터키 땅으로 이주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릴 피를 나눈 형제 국이라고 사랑한답니다. 사실입니다. 고구려와 걸안은 같은 흉노였지요. 우리도 터키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보스포르 해역에서 쿠르즈 관광을 끝내고 육지로 나섭니다.

 

김형!

한사람이 위대한 영웅은 민족과 나라를 지킵니다. 히포드럼 광장에서 전쟁 영웅들의 기상을 들추어 보면서 느낀 것입니다.

 

이곳은 길이 450터의 전차 경주 장입니다. 이 경기장은 전차 부대가 사열을 갖추고 출전의 깃발을 높이 든 연병장 겸. 전차 경주를 관람하는 곳입니다. 영화 ‘벤허’에서 보여줬던 전차 경기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지요. 광장의 크기가 웅장합니다. 광장 안엔 3개의 탑이 있습니다. 뱀탑2개와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입니다. 장함이 대단합니다.

 

김형!

전쟁과 사랑, 삐에르의 언덕에서 슬픈 사랑의 연가를 듣습니다.

 

삐에르 언덕은 이스탄불의 아름다운 야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명소입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공동묘지인 삐에로티 언덕에 올라서서 석양에 바라다 봅니다. 마르마즈 해와 보스포러스 해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삐에르 로티 찻집’ 에서 삐에르로티와 아지아드의 사랑 이야길 들으면서 차 한 잔을 마시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의 대 소설가 삐에르 로티가 쓴 ‘이스탄불의 골든 혼’ 이란 소설이 이 언덕을 배경으로 썼답니다. 삐어르 로티는 이곳에서 자신이 경험한 이야길 소설로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그가 작업하던 삐에르 로티 찻집은 공동묘지 안에 있는 찻집인데 황혼의 이스탄불을 바라보는 명소가 되었어요.

 

골든 혼은 오스만 투르크가 동로마제국을 점령할 때 최후의 전투를 치룬 곳으로 양쪽군 다 수천 명이 죽었던 전투장이었다. 그때 죽은 용사들은 현장에 묻었는데 그 공동묘지를 골든 혼이라고 부른다.

 

소설 “이스탄불의 골든 혼” -삐에르 로티-

 

프랑스 해군 대위 삐에르 로티가 이스탄블에 파견 근무를 하다 미망인 인 아지아드란 아름다운 미모의 터키 여성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사랑하게 빠졌는데 삐에르가 복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지요.

 

헤어진 연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였으나 만날 수가 없었는데 로티가 제대를 하고 아지아드를 찾아 이스탄블로 왔으나 그녀는 없었다. 알아보니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미망인이 다른 남성과 염문을 나누며 죽임을 당하는 제도로 그녀는 사형을 당했다.

 

그는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공동묘지에 집을 얻어 그녀와의 사랑 이야길 소설로 썼다. 그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스탄블 이 언덕에 머물며 소설을 썼다. 사람들은 그 언덕을 슬픈 삐에르 로티 언덕이라고 불렀고 훗날 그들이 사랑을 나누었던 삐에르 언덕에 찻집이 세면서 유명해졌다.

 

*삐어르 로티(pierre lot ): 1850-1923년, 프랑스 베스트셀러 소설가

 

김형!

토카피(dokapi)궁전에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 궁전은 이스탄블 최고의 오스만 제국의 궁전인데 메메트 2세 술탄이 1299년콘스탄틴 노풀을 점령한 기념으로 지은 궁전인데 1699년까지 400년 간 궁전으로 사용 하였다.

 

메메트는 기독교 성당이 마주보는 곳에 이슬람 성당과 궁전을 지었다. 바로 그가 로마 성벽을 허물고 입성한 초입에 궁전을 지었던 것이다. 그길은 자갈로 만든 모자이크가 깔려 있었다.

 

김형!

블로모스크(bluemosque)로 발길을 옮깁니다.

 

이제 동서 문화의 충돌과 종교의 충돌이 잘 화합된 곳으로 갑니다. 17세기 이슬람이 건설한 기도처인데 6개의 첨탑 미나레(minare)가 그 위용을 자랑합니다. 입장할 때 여자는 헤잡을 쓰고 들어가야 합니다. 푸른색 창 아름다운 미학을 자아냅니다. 마주보는 곳에 그리스 정교의 성소피아 성당이 우뚝 서서 기개를 자랑합니다.

 

이곳에서 이슬람과 카톨릭의 위세를 비교해 봅니다. 그러니까 블루 모스크는 이슬람 성당이고 소피아 성당은 카톨릭 성당인데 성당에 이슬람 기도처가 있어서 두 종교의 공존하는 성역을 보여 줍니다.

 

김형!

발길은 이슬람의 최고 지도자 술탄이 거주했던 돌마바우체 궁전(dolmabauche)으로 옮깁니다.

 

보스포러스 해와 다리가 바라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 하다는 이슬람 술탄의 왕궁입니다. 1843년 압둘레지드 하렘이 술탄이 되면서 토카프 궁전이 싫어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여 지은 궁전으로 이사를 합니다.

 

내부 기둥은 금도금(14톤)과 은도금(40톤) 대리석으로 포장 되었고 천정과 창문은 크리스탈 (4.5톤)로 지었다. 사실 기둥은 나무인데 대리석으로 쌓고 금도금을 했답니다. 바닥은 나무판 조각을 모자이크로 붙여 깔고 그 위에 최고급 양탄자로 깔았다. 연회장으로 활용했다는 궁전내 최고급 장식의 응접실은 술탄의 왕비를 간택한 장소입니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가 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서면서 초대 대통령 아타트르크 가 이 궁전을 사택으로 만들어버렸다.

 

김형!

거룩한 자여 어디로 가십니까? 성소피아 성당에서 종교의 화합을 느낍니다.

 

1453년 메헤메드 2세의 오스만 터키가 콘스탄틴 노풀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이 대성당을 회교 사원으로 만들어 900년 간 사용하였다. 내부의 카톨릭 벽화나 모자이크를 그대로 두고 코란을 외우는 모스크로 사용 하였다는 것은 종교의 화합이었습니다.

 

성소피아 성당은 17세기 비잔틴 최고의 성당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내부의 장식과 모자이크, 대리석, 돔은 카톨릭 그대로 입니다. 돔 중앙에 추를 늘어뜨려 땅바닥에 십자가를 긋고 그 중앙에 추가 고정되게 하여 건물의 이동을 측정했는데 지금도 꼭지점이 일치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스탄불에 지진이 많은 터라 꼭지점이 비틀어짐으로 지진을 측정했다는 겁니다.

 

김형!

그랜드 바자르(grandbazarr)에서 실크로드 상인의 숨결을 느낍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상인과 유목민들이 휴식과 여숙을 위하여 마련 된 장소인데 지금은 세계적인 시장으로 이슬람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시장으로 변천하여 관광객을 끌고 있었다. 동서를 오가는 무역상들이 잠시 쉬어가던 길목의 여숙과 상점이 늘비하던 그곳에 중앙 통로를 내고 물건을 파는 거대한 시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나서서 사과차를 마시며 문을 여는 상인들의 모습이 한가롭습니다.

 

2. 神話속에 잠자는 그리스

 

김형!

정복자와 패자의 역사가 엇갈린 이스탄불을 관광하고 이제 신화의 나라 그리스로 떠납니다.

 

동 이스탄불 실리브리를 지나 천상의 선녀가 춤추는 압살라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국경을 넘어 그리스 알렉산드라 폴리스로 넘어갑니다. 입국 수속은 국경 톨게이트 버스 앉은 채 마치고 대기한 버스를 타고 그리스로 입국합니다. 코머타를 지나 베로이드로 가서 아그나티아 고속도로를 달려 필리라 테살로니카, 핀데산 산맥을 타고 달려 올림포스 산을 바라보며 벨로리아로 접어들어 강을 따라 트리칼라의 수도사들이 은둔한 암벽성당 메테오라로 갈 것입니다.

 

김형!

잠시 그리스의 역사를 살펴 볼까합니다.

 

고대 그리스는 미노아 문명과 미케네 문명이 합작한 문명입니다. 기원전 776년에 첫 올림픽이 열린 시기부터 고대 그리스의 형성기라고 봅니다. 도시국가 간의 전쟁이 치열하던 시기죠. 그러나 도시국가 연합 그리스는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정복당하여 헬레니즘 문명을 만들었지요.

 

그리스 문명은 서구 문명의 시발점으로 로마 문명에 영향을 끼쳤고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에 큰 영향력을 주었어요.

 

고대 그리스는 수많은 폴리스가 각각의 독립된 실체로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는 철학자, 문학가, 역사가들에 의해서 문명의 발전했지요.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핀다로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사포 같은 문인들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정치인으로는 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 리산드로스, 에파미논다스, 알키비아데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 등이 있고 철학가로는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데모크리토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있었다.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AD 500년 – 448년)은 동서양 전쟁이란 의미에서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쟁 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페르시아를 견제하는 맹주가 되었다. 스파르타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맞서 두 나라의 갈등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AD 431년)으로 이어진다. 두 폴리스간의 오랜 전쟁은 결국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한다.

 

김형!

알렉산더 대왕은 20대 때 세계정복을 꿈꾼 영웅이었지요.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학문을 배워 20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334년에 페르시아,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를 차례로 정복하고 정복한 땅에 그리스인을 옮겨 살게 하였다.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 도시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케이아로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였다.

 

AD 323년 아테네와 동맹국들은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항하였으나 라미아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마침내 그리스를 정복하고 그리스 문화와 아시아 문화를 교류 융합시켜 헬레니즘 문화를 창조 하였다. 그리고 페르가몬, 에페소스, 로도스, 셀레우키아 같은 지중해의 도시국가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낸 신화적 영웅은 인도를 점령하러 갔다가 말라리아에 병들어 32살의 나이로 죽고 만다. 그러나 그는 동서양의 문물을 유통시킨 젊은 영웅이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휘하의 장군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몇 개의 새로운 왕국으로 나뉘게 된다. 장군들은 새 왕조를 열면서 저마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디아도코를 형성한다. 이집트에서는 소테르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셀레우코스 제국이 생겼고 그리스에서는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가 안티파트로스 왕조를 세웠다.

 

AD 26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동맹하여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크레모니데스 전쟁을 일으키지만 패하여 아테네는 주권을 잃고 말았다.

 

AD 227년 스파르타가 아카이아를 침공하자 아카이아는 이웃한 마케도니아에 원병을 청하였고 이로 인해 스파르타와 마케도니아 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결국 마케도니아는 스파르타를 점령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갈수록 강성해지는 로마에 맞서 기원전 217년 그리스 도시국가와 강화 조약을 맺어 아테네, 로도스, 페르가몬을 제외한 그리스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기원전 215년 필리포스 5세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AD 212년 로마와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인다. 같은 시기에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격퇴하고 로마와 마케도니아가 맞선다.

 

김형!

영원한 제국은 없는 것이 맞아요.

 

AD 198년 로마와 마케도니아가 제2차 전쟁을 벌이죠. 이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하고 네 개의 작은 공화국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고 기원전 146년 마케도니아를 멸망시켜 로마의 지방 행정 구역으로 삼았다. 로마의 행정 구역이 된 마케도니아의 중심 도시는 테살로니키였다. 로마는 그리스 도시 국가의 전통적인 자치를 인정하였고, 아테네의 아고라는 문명과 정치의 중심지였다.

 

로마 시대가 열립니다. 212년 로마황제 카라칼라는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로마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안토니누스 칙령을 선포하였다. 이 칙령으로 지중해를 둘러싼 로마 제국의 모든 곳에서 동일한 법과 경제 체제가 적용되었으며 지방 행정 구역의 지위가 상승하게 되었다.

 

김형!

로마는 방대하여 동서로마로 분할하는 제국이 되었어요.

 

AD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을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아 도시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폴리스라 하였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뒤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 되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 하였으나 동로마는 제국을 존속시켰으며 계속하여 번영하였다.

 

동 로마제국은 한때 게르만족들이 점령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 일부를 회복하기도 하였으나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아나톨리아 및 지중해 동부 연안, 흑해 연안과 중동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비잔틴 제국으로 성장하였다.

 

610년 헤라클리우스는 제국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꾸었고 황제의 명칭도 그리스어인 “바실레우스”로 부르게 하고 동로마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비잔티움 제국이라 불렀다.

 

1453년 결국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김형!

정말 대단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왔어요. 이제 편히 여행을 할 것 같아요.

 

메테오라로 가는 길엔 샤프란 꽃이 가득히 해안에 피어 있어요. 이길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니키아를 군을 이끌고 동방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마케도니의의 수도 암피폴리스를 지나는데 해변 멀리 멀리 플라밍고가 나는 전원 풍경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어디선가 멜리나(만도린)의 구성진 음률이 페드라를 연주하고 있었다. 페드라는 이 고장을 배경한 슬픈 영화죠.

 

1962년 조르바.니콜스카찬차거스가 그리스 신화 페드라의 스토리를 현대판 영화로 만든 ‘페드라’가 회상 됩니다. 정말 매혹적이며 비극적인 영화로 기억이 생생합니다. 바로 이곳이 그 영화의 현장이랍니다.

 

*페드라(영화)*

미모의 30대의 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는 그리스 해운왕의 딸로 거부 타노스(라프 바로네)의 후처로 들어가지만, 그녀는 의붓아들 알렉시스(안소니 퍼킨스)를 사랑하게 되고, 순진한 알렉시스도 계모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차츰죄악감을 느끼고 페드라에게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페드라의 집착은 심해져 가는데... 때마침 페드라 호가 좌초되고, 남편이 알렉시스를 조카 에시와 결혼 시키려는 사실에 페드라는 질투와 절망 끝에 남편에게 ‘알렉시스를 사랑한다.

 

그는 나의 연인이라고’ 충격적인 고백을 하게 되고......끝내, 페드라와 알렉시스는 절망적인 운명을 향해 내달린다. 자실, 렉시스의 시신이 두꺼운 천에 싸여서 집에 들여오는데 패드라도 자살을 해버리고 마지막으로 혼자 남은 아버지며 남편인 타노스는 자신이 일만 알고 가정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책임을 실감한다.

 

김형!

이스탄불에서 장장 12시간을 달려 메테오라 암벽위의 수도원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스 중부 테살로니아 서북부트리 칼라주, 암벽위에 세워진 수도원은 이슬람 정권에 쫓겨 멀리 고산으로 피신 해 온 수도사들이 암벽에 수도원을 짓고 살았던 곳입니다.

 

피니오스강과 핀더스 산(2670미터)이 바로 보이는 칼라마 마을 호텔에 짐을 풉니다. 이곳은 페타치즈가 유명한 곳입니다. 그리스의 최고 유적은 파르테논 신전이고 해양 명소는 크루즈를 타고에게 바다의 풍치를 감상하는 산토니섬이지만 순례자들과 관광객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곳이 ‘메테오라 수도원’ 이랍니다.

 

김형!

짐을 풀고 메테오라 수도원에 올라봅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 소아시아(터키)필리페, 데살로니, 아테네, 고린도로 전파 되었지요. 그 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카톨릭은 로마와 그리스 동방 정교로 분리되어 대립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독립 체제를 이루는데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으로 오스만 투르크가 종교 통합을 이루어 밀레테제로 독단의 체제를 성립 했는데 그리스 정교도들은 이슬람의 지배를 거부하고 메테오라로 쫓겨와서 암벽위에 수도원을 짓고 살았다.

 

수직 절벽 바위 위의 수도원은 인간 한계의 상상력을 초월한 건축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형!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종교는 화합할 수 없는 양상을 보였지요. 인간을 구원하는 종교가 인간을 차별하고 격리하고 반목하는 도구로 변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인류는 수많은 종교 전쟁으로 멸하고 성하면서 수많은 인간을 죽였어요.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반목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요.

 

이제 아테네로 갑니다. 메테오라에서 자동차를 타고 6시간여 해변도로를 따라 달리면 아름다운 자연의 풍치에 묻히게 되고 해변을 따라 버스는 해발 1천 미터의 고도의 해변 도로를 달립니다. 산악을 내려서는 멀리 도시가 보이고 그 가운데 우뚝한 올림포스 언덕이 보였다. 아테네였다. 아테네는 올림포스 언덕을 중앙에 두고 사방으로 둘러 퍼진 도시입니다. 2000년 고도의 아테네에 도착하였다.

 

아테네는 아티키 분지 중앙 평야에 자리 잡고 있어요. 이 분지는 서쪽에 에갈레오 산, 북쪽에 파르니타 산, 북동쪽에 펜텔리 산이, 동쪽에 이메토스 산이 있고 파르니타 산이 가장 높은(1,453m), 국립공원이었다. 남서쪽으로는 사로니코스 만이 있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로 1896년 제1회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영광을 누렸다. 인구는 480만, 고대 아테네는 강력한 도시 국가였다. 예술, 학문, 철학의 중심지였던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뤼케이온이 있었다. 소크라테스,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 등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기원전 4.5세기경 아테네는 서구 문명의 요람이자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고대 유산으로 수많은 기념물과 예술 작품이 남아 있다. 신들의 제국 아테네는 12개 도시국가 중에서 문화가 가장 발달한 도시였다. 아테네가 그렇게 문명도시로 발전한 것은 유명한 아리스토텔라스, 소쿠라테스 플라톤 같은 철학자와 유명한 역사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제우스신을 비롯한 12신들이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형!

신들의 신전인 파르테논 신전으로 들어갑니다.

 

기둥만 남은 파르테논 궁전에 햇빛이 강렬합니다. 눈부신 햇빛은 찬란한 고대문명을 자랑한 무너진 신전을 녹이고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이었다. AD 5세기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건설되면서 도리스식 기둥 양식 건축의 세워졌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치를 하던 의회였다.

 

그런데 다 부서진 신전에 12개의 기둥만 웅장하다.

 

파르테논 신전(Pre-Parthenon)은 거의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파괴 되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달로스 동맹 때 금고로 사용하였다. 기원후 6세기에 파르테논 신전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기독교 교회였다.

 

오스만 제국에 정복 때는 모스크로 쓰였고 첨탑이 건설 되었다. 1687년 9월 26일 파르테논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 투르크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불이 붙어 신전과 조각물이 크게 훼손되었다. 신전의 부서진 엘긴 대리석들은 1816년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매각 되었다. 그리스 정부는 엘긴 대리석 조각군을 다시 그리스로 반환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다.

 

김형!

파르테논이란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아세요? 제프리 M. 허윗의 말에 따르면 ‘처녀의 성’ 이란 뜻이랍니다. 이 신전의 어느 방에 아테나 여신을 위해 페플로스를 짜는 4명의 처녀가 있는데 이들 중에 한명을 제사 때 죽여서 신전에 바쳤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에 맹종하는 슬픈 사연이 서려 있었어요. 그 후 웅변가 데모스테네스가 처녀의 성을 파르테논이라 불렀답니다.

 

김형!

아고게(agoge)가 뭔지 아시죠? 스파르타식 교육이랍니다. 고대 스파르타는 엄격한 국가주도 교육을 시켰지요. 교육 목적은 오로지 강한 체력을 갖추고 국가에 봉사하는 애국 인간을 키우는 교육으로 국가가 교육을 철저히 통제했다.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신체검사를 해서 허약한 아이는 산 속에 내다버리고, 건강한 아이만 키웠던 강압적이고 조직적인 교육을 하였다.

 

스파르카 다른 도시국가보다 더욱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스파르타의 교육으로 만들어진 전사들이었죠. 항상 전쟁을 대비한 훈련을 강화했고 남녀가 다 전투에 참가했으며 전투에서 절대 후퇴가 없는 오로지 전진뿐이었다. 후퇴를 하거나 도망자는 처형하였고 어머니들은 전투에서 한발국도 물러서지 않는 자식으로 훈련시켰다.

 

김형!

잠시 숨을 돌릴 겸 아테네의 그리스 대통령 관저가 있는 산타그마 광장으로 갑니다. 12시, 정문지기 교대 시간에 우수캉스런 사열을 보고 디오니소스 원형 극장에서 아테네 민주 정치의 면모를 살펴보았습니다.

 

김형!

아테네 거리에서 디폴트에 휘말리는 그리스의 풍경을 보았답니다. 거리에 맴도는 유기 견들이 왜그리 많은지요. 도시, 농촌, 거리, 산, 해변 가릴 곳 없이 커다란 유기 견들이 무섭게 돌아다녔어요. 광장과 도로에서 잠을 자고 고속도로를 횡단하고 있었어요. 그리스의 현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르다가 버린 유기견이랍니다. 스위스가 디폴트 상황에 도달하여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먹을 것이 없으니까 개를 거리에 내버렸다는 것이었다. 거리로 나온 개들은 지들 나름대로 먹이를 구하면 살아가고 있었다. 정부에선 이들 개를 정규적으로 전염병 주사를 놓아주고 다시 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남은 음식을 이들 방사된 유기 견들에게 갖다 주고 있었다.

 

그리스는 산이 많지만 경작지가 많은 나라였다. 그러나 한심한 것은 3차 산업은 발달 되었으나 2차 산업이 없었다. 전 국민의 80%는 실업자이고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다. 국민은 온통 3차 산업인 관광 산업에만 종사하고 1차 산업에 종사하길 꺼렸고 2차 산업이 전혀 없으니 직장이 없었다. 내가 보기엔 늙고 낡고 병들은 이 나라는 도저히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형!

아테네에서 다시 6시간 버스를 타고 히오스로 가서 페리를 타고 터키 쉬린체로 갈 것입니다. 터키 이즈미르로 가는 쿠르즈를 타려고 아테네를 떠납니다. 피레우스 항구에서 터키로 가는 야간 쿠르즈를 탑니다. 배안에서 9시간 동안 숙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터키로 들어가서 내륙 기행을 할 것입니다.

 

3. 종교 갈등과 전쟁의 역사

 

김형!

역사는 힘 있는 자의 독식인가요? 다시 쿠르즈에서 하룻밤을 자고 에게바다를 건너 터키로 와서 나라 없는 사람들의 비애를 봅니다.

 

터키 첫 기행은 쉬린체 마을부터 시작됩니다. 쉬린체 마을은 오스만 터키 지배 때 그리스도교인들이 이주해 와서 살았던 마을이다. 주류 생산으로 유명하였다. 터키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생산하는 곳으로 각종 과일주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쉬린체는 샤프란 블루 등 다양한 와인을 만드는 고산 마을이었다. 산으로 오는 길은 아주 위험한 난 코스였다. 길을 따라 잘 가꾸어진 올리브 나무가 산 전체에 조성 되어 있었다. 터키는 올리브 생산 최대국으로 수확은 국가에서 매수해 간다는 것이다. 쉬린체 마을에서 와인 시음을 하고 나서 에페소로 행합니다.

 

김형!

에페소는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살았던 도시예요. 로마의 문명은 바로 에페소의 문화를 옮겨 놓은 것이랍니다. 에페소에서 초기 로마 제국의 유산을 그대로 볼 수 있어요. 원래 그리스 인이 살았으나 훗날 로마인이 터키로 오면서 고대 로마문명을 활짝 일으킨 곳입니다.

 

그 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에페소는 로마의 소아시아 서부지역 수도가 되었고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BC 88년 에페소 시민들이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의 실라(Sylla)장군은 에페소를 완전 초토화시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BC27∼ AD14년) 때 다시 재건된 이 도시는 로마의 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페소는 이즈미르(Izmir)로부터 74km 거리에 위치한 도시로 바울로 시대에 번창한 항구였으나 지진과 해일 스나미로 카이스트로스강을 타고 온 토사가 항구를 묻어버린 도시를 재발견 해 낸 유적이다.

 

지금 바다는 에페소로부터 멀리 물러나 있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해방되었고 대왕이 죽은 후, 에페소는 대왕 휘하의 장군 리시마코스가 경기장, 체육관, 원형극장을 세워 에페소를 크게 발전시켰다. 상업의 중심지로 AD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165m에 이른 도로를 건물 밀집 지역으로 만들고 25만 명이 살았던 도시였다.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전의 로마인들은 알테미스 여신을 숭상했다. 에페소의 고대 도시의 대로를 따라 유적이 늘어서 있었다. 초입에 다산의 여신인 알테미스가 24명의 남자를 거느리고 서 있었다. 그녀는 프리섹스의 상징이다.

 

그런데 히드리안 신전 앞에 행운의 여신 메두사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서 있었다. 그리고 바리오 목욕장에서 걸음을 멈춘다. AD 1세기에 만들어진 목욕탕인데 현대적 탈의실, 냉실, 미온실, 온실, 사우나실 등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아고라 시청사는 AD 3세기에 완공 되었는데 시의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사무실로 쓰였다. 바실리카 대성전 오데온은 공중 집회소로 시 의회실로 쓰였다. 무대 뒤편으로 두 줄의 기둥이 서 있는 곳이 재판을 하는 법정 바실리카이다.

 

오데 온(Odeon)은 서기 150년 경에 지은 극장인데 원로 회의장과 연극을 상영하는 장소로 1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메비우스의 기념비은 도미티아누스 광장의 산기슭에 뫼비우스의 가족 이름을 새겨진 기념 동상이다. 히포크라테스의 병원 분점도 있었다. 뱀 표시는 병원, 의사를 상징하는 마크였다

 

헤르메스상은 올림포스 12신 가운데 주신 제우스와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헤르메스를 상징하는데 가축의 증식을 관장하는 부와 행운의 신, 길을 지배하는 신, 통역· 상업· 꿈을 옮겨다 주고 경계를 지키는 신으로서, 죽은 자를 지하 세계로 인도하는 신이기도 하였다. 지팡이와 샌들이 트레이드마크이다.

 

니케(Nike)는 승리의 여신상이다. 로마 신화의 빅토리아에 해당 한다. 그녀는 팔라스와 스틱스의 딸이다. 제우스와 아테네의 종자(從者)이며, 날개가 있고 종려나무 가지와 방패· 월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전쟁의 여신 아테네와 모습이 비슷하다. 나이키의 로고가 바로 이 여신에게서 나왔다.

 

폴리오의 우물은 에페소의 부자 폴리오와 그의 가족의 후원으로 만들어 졌다. 큰 분수대가 있었는데 이 도시의 수도물을 공급하는 물 저장 탱크다. 트로이 전쟁 이후 오디세우스의 포리펨 의 모험을 보여 주는 동상도 발굴 되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신전은 서기 81~96년 사이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만든 신전으로 발굴된 도미티아누스 동상의 팔과 머리 부분은 현재 에페소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트라이아노(Traianus) 황제 기념 분수는 AD 2세기 초에 세워졌으며, 12m 높이의 트라이아노 황제 동상은 그 발목에서 물이 흘러나오도록 설계 되어 있다. 물은 수로를 통해 귀족계층 가정과 목욕탕에 공급 됐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2세기경에 지어진 하드리안 황제와 에페소의 시민,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해 지어졌다. 조각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테네, 아폴로신등 여러 신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그의 아버지, 아내, 아들도 조각되어 있다.

 

공중 화장실 아래에 수로가 흐르고 배수 망이 잘 연결되어 U 자형 구멍으로 용변을 본 후에 변기 앞에 흐르는 물로 오물을 깨끗이 씻어내는 비데시설도 되어 있었다.

 

크레테스 거리를 한참 내려가며 셀시우스 도서관이 기둥만 우뚝하게 남아 있었다. 에페소 유적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로 손꼽힌다. 높은 초석 위에 세워진 이 건축물은 넓은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셀시우스 도서관은 서기 135년, C. Aquila에 의해 아시아 지역의 통치자였던 아버지, 플레마이아누스를 기리기 위하여 지어졌다. 이 도서관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데 상단부터 지혜, 운명, 지식을 상징하는 문으로 정결한 여성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셀시우스의 무덤은 중앙 적소 아래 지하에 위치해 있다. 당시 세계 3대 고대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페르가문 도서관 및 셀시우스 도서관이다.

 

셀시우스는 당시 이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해 통치하였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도서관은 많은 부분이 무너졌지만 외벽은 아직도 굳건히 서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리저리 연결된 도서관의 지하통로가 홍등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야외 원형 극장은 클라디우스황제(AD 41-54)때 공사가 시작되어 Trajanghkd황제(AD 98-117)때 완성되었다. 노천극장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약 2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극장이다. 3단 구조이며 각 단은 22계단으로 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선교 중 은세공 장이들과 논쟁이 붙었던 곳이기도 하다. AD 2세기 초에 완공되었으며, 지금도 공연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건축 초기에는 공연을 위한 곳으로만 이용되었지만 특별한 날엔 로마 제국 때 유행하던 검투사들과 맹수의 결투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세계의 유명한 음악가들이 이 무대에 서기를 원하는데 소리의 울림이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공연장보다 소리의 울림이 좋다는 것이다.

 

바로 옆의 건물은 창녀의 집이란다. 창녀의 집은 거리의 가장 번화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공연장에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따라 다녔던 것 같다.

셀시우스 도서관에 책들은 파피루스 종이에 레드카펫이나 모자이크로 장식 되어 있었다.

 

김형!

에페소의 히드리안 신전을 관광하고 6시간 여정의 파묵칼레로 갑니다.

 

파묵칼레(pqmukalre)는 목화의 성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석회암이 온천수에 녹아 하얀 석회가 목화송이처럼 지상에 굳어 장관을 이루었다. 이곳은 원래 하에로 폴리스로 기원전 2세기 페르가와 가문의 우메네스왕이 노천 온천수가 흐르는 곳에 건설한 아름다운 휴양도시다.

 

에페스. 베르가와 해안도시의 히어로 폴리스에 건설한 휴양 병원 도시이다. 이곳은 휴양지인 만큼 유적들이 대단히 많았다. 히에로 폴리스 파묵칼레는 로마의 원형 극장이 있던 곳이다. 페르가문의 황후가 거처한 궁전인데 로마에 흡수 통일되면서 사라졌다. 메크로 폴리스도 히에로 폴리스와 같이 로마에 흡수되었다.

 

김형!

휴양 온천수 도시 파묵칼레에서 온천수에 족욕을 하니 전신이 황홀한 것 같습니다. 이제 피로를 풀었으니 카파토키아로 가렵니다.

 

카파토키아는 아나톨리아 고원의 괴레메 마을에 버섯처럼 생긴 기암괴석 풍경이 있는 곳인데 열기구를 타고 풍경을 감상한답니다. 괴암 버섯은 화산폭발로 생긴 응회암이 오랜 풍화작용으로 바위가 버섯 모양의 풍화하여 아름다운 형체를 이루고 있지요.

 

새벽부터 열기구를 타려고 모여 든 관광객으로 붐볐다. 열기구는 큰 풍선에 열기를 몰아넣어 팽창하는 힘으로 날아가는 기구이다. 가스통에서 가스를 분출시켜 불을 붙인 열기를 조종사가 잘 조정하여 100미터 상공까지 날아올라 1시간여 카파토키아의 아름다운 버섯 바위 풍경구를 볼 수 있는데 한꺼번에 100여개의 열기구가 나는 풍경은 과히 장관이다.

 

열기구를 타고 와서 파샤바 계곡으로 날아가서 수도사의 골짜기를 내려다본다. 버섯 바위에 구멍을 뚫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도 들인데 이슬람에 쫓겨 이곳에서 숨어 사는 사람들이다.

 

김형!

자연의 아름다운 풍물을 만들어 내는 조물주는 누구일까요?

 

데린구유가 그런 곳입니다. 지하 도시에 사람이 산답니다. 이슬람 제국에 쫓겨 다니던 그리교도 교인들이 지하 도시에서 400년 동안 숨어 살았답니다. 데린구유 마을에 지하 마을이 30여개가 있는데 모두 연결 통로를 가졌답니다. 이곳 말고 다른 지방에도 120여개의 지하도시가 있답니다.

 

데린구유 지하도시는 기원전 3세기경에 생긴 것으로 종유석에 지하수가 흘러 녹아 생긴 동굴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데 이곳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주거 시설을 갖추고 이슬람의 눈을 피해 가면서 살았는데 동굴 속에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고 불을 때고 필요한 모든 생할시설을 다 갖추고 살았답니다.

 

이 지하도시가 발견된 것은 지금부터 60년 전에 닭을 기르던 한 농부가 닭이 사라지는 것을 의아해 했는데 닭이 바로 지하 도시로 들어가서 못 나오는 것을 봤답니다.

 

이슬람 정권은 이들을 밖으로 나와서 살기를 허락 했는데도 이들은 믿지 않고 40년을 더 지하 동굴에서 산 사람들도 있답니다.

 

김형!

이제 터키문화 유적 관광을 마치고 수도 앙카라로 갑니다.

 

터키는 1923년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터키 공화국이 서면서 콘스탄틴 노풀의 오스만의 수도를 앙카라로 옮깁니다. 앙카라는 인구 800만으로 초대 대통령의 고향이다. 터키는 이슬람국이면서 근본주이 교도가 아닌 자유롭게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이다. 주음식은 케밥인데 불고기 슬라이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불로 구운 고기는 모두 케밥이라고 합니다. 앙카라엔 트랜바이(전차)와 메트로도머스 전동차는 교통수단을 대변하고 있어요.

 

김형!

오스만 돌궐을 아십니까? 1453년 오스만 투르크(돌궐)가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블루모스크(기도장)을 만들어 술탄이 통치하는 제국으로 이어왔는데 1923년 투스타 케말 아타트럴 파사(장군)이 부패한 이슬람의 술탄 정부를 무너뜨리고 앙카라에서 터키 민주 정부를 수립하여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방랑자가 된 비극의 오랑 왕자

터키 정부는 오스만의 31대 마지막 술탄의 아들 오랑 왕자를 영국으로 추방했다.

 

그는 70년의 방랑 생활을 하면서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추방당해 방랑한지 50년 되던 해 터키 국민들이 가없은 그를 조국에 와 살게 하였으나 그는 조국에 살지 못하고 다시 떠나 20년을 더 방랑 생활을 하다가 객사하여 70년 후에 죽은 시체로 고국에 돌아왔다.

 

6세기 중반 돌궐(투르크)족은 동북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돌궐은 당나라에 의해 밀려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11세기에 투르크 유목민의 한 집단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이동 해 와서 터키에 안주한다. 이후 투르크족은 이슬람 화 되었고, 최초의 무슬림 왕조인 셀주크가 등장한다. 셀주크 제국은 11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중앙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다스린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며, 중앙아시아의 부족연합체로 발흥하여 중동에서 투르크 세력의 시조를 이루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 셀주크는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히 세력을 상실하고, 몇몇 토후국으로 분할되었다. 오스만 왕국이 탄생하여 이스탄블을 수도로 정하고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제국이었다.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소 군주국 오스만 왕조는 동로마 제국과 동유럽의 기독교 제국, 맘루크 왕조,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제국을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의 과반을 차지한 세계 대제국인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13세기 말에 카이족의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왕조를 세웠다. 그들이 투르크족의 가지스(이슬람교 전사들)를 지도하였다.

 

14세기 후반 오스만족은 마침내 서부 아나톨리아와 남동부 유럽의 비잔틴 영토를 차지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발칸 국가들을 속국으로 삼았으며, 동부 아나톨리아의 투르크멘 공국을 점령했다. 15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은 발칸 속국들을 직접 통치하고, 특히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유프라테스 강과 헝가리까지 영토를 넓혔다.

 

16세기 후반에는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발칸 제국과 중부 유럽의 헝가리,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술탄 쉴레이만 1세(1494년)의 통치 이후에 쇠퇴기를 맞았다.

 

1718년 경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축출 했으며, 러시아는 1783년에 크리미아를 빼앗았다. 그리스도 1830년, 영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하였고 1881년에는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였으며 1908년에는 불가리아, 1912년에는 알바니아가 독립하였다. 이렇게 오스만 투르크는 방대한 제국을 앓고 터키로 좁혀졌다.

 

김형!

이것으로 저의 그리스 신화와 대제국 오스만 투르크 역사가 깃든 이스탄불 기행을 마칩니다.*<소설가 : 김용필>

 

최근기사

네티즌 의견28
내용은 200자 이내로 적어야합니다. 기사와 무관한 글은 임의로 삭제 될 수 있습니다.
(스팸방지코드  )
의견
쓰기

최근 가장 많이 본 기사인물

  1. 신낙형
  2. 문진국
  3. 백운기
  4. 송훈
  5. 고성주
  6. 김윤탁
  7. 류 자
  8. 노현송
  9. 한정애
  10. 신창욱
  11. 김병로
  12. 장청기
  13. 김광수
  14. 박국인
  15. 권오륜
  16. 김성태
  17. 강미영(1)
  18. 소재진
  19. 강선영
  20. 김용호
  21. 조용구
  22. 전은령
  23. 김성미
  24. 이종수
  25. 박일
  26. 조만환
  27. 김응권
  28. 이철희
  29. 류민지
  30. 남상일
최근 가장 많이 본 기사인물은 독자들이 기사인물에 대한
클릭수(읽기)가 실시간으로 적용된 것입니다.

최근 가장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