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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읽는 행복한 시' 안도현 시인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안도현

기사입력 2015-08-03 오전 9:24:4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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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읽는 행복한 시] 안도현(1961~)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안도현(1961~)

 

 

당신의 그늘을 표절하려고 나는 밤을 새웠다

 

저녁 하늘에 초승달이 낫을 걸어놓고 모가지를 내놓으라 하면 서쪽으로 모가지를 내밀었고, 달빛의 헛구역질을 받아먹으라고 하면 정하게 두 손으로 받아먹었다

 

오직 흔들리는 힘으로 살아가는 노란 꽃의 문장을 쓰다가 가늘게 서서 말라가도 좋다고 생각한 것은 바구지꽃이 피는 유월이었다

 

내 사랑은 짝새의 눈알만큼만 반짝이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내 사랑은 또한 짝새가 날아가는 공중의 높이만큼 날개 아래 파닥거리는, 사무치게 떨리는 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저 재바른 차를 폐차시키겠다, 귀가 순하고 소심한 노구의 당나귀나 한 마리 사서 한평생 당신을 싣고 다니는 게으른 노역이 주어진다면 쾌히 감당하겠다

 

눈썹이 하얗게 센 뒤에 펜을 잡고 한 줄을 쓰고, 열두 밤을 지나 그다음 문장으로 건너간다고 해도

 

▲ 안도현 시인

 

 

 

-시집 <북항> 문학동네

*바구지꽃은 미나리아재비꽃을 말한다.

 

올해로 등단 31년을 맞은 시인. ‘연어의 작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연어는 130쇄 이상을 찍으며 베스트셀러가 된지 오래다. 백석의 시 모닥불을 처음 만난 스무 살 무렵부터 백석을 30여 년 동안 짝사랑한 그가 최근 백석의 모든 것을 모아 그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수록하고 해설한 백석평전을 펴냈다.

 

그의 시집 모닥불의 표제 시는 동일 제목인 백석의 모닥불에서 따왔고 이 시의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는 백석의 '흰 바람 벽이 있어'의 한 구절을 그대로 따와 제목으로 삼은 시다. 이처럼 그는 당신의 그늘을 표절하려고 나는 밤을 새웠다라고 말하며 어떻게든 백석을 베끼며 닮고 싶어 했다.

 

이 시가 실려 있는 10번째 시집 북항은 그 첫 장이 '일기'로 시작되는데 이 시는 당시 문인들이 뽑은 최고의 시로 선정되어 지금도 많은 독자들이 찾아 읽고 있는 작품이다.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일기>

절창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시인은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를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하여 독자들에게 선물했다. 그가 얼마나 백석을 좋아하며 따르고 싶어 했는지 알 수 대목이다.

 

전북 완주에 가면 '구이구산(九耳九山)'이라는 작업실이 있다. 구이구산은 바깥세상 이야기를 많이 듣고 많이 쓰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난 대선 때 트위터에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겠다.”고 일시적인 절필을 선언해 문단과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새삼 주목을 받기도 했다.

 

문득 연탄 한 장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삶이란/나 아닌 그 누구에게/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우리들의 삶은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온몸을 불사르고 자신은 사라지는 연탄 한 장 같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 시이다. 이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의 시를 하루빨리 볼 수는 없을까?

 

시인은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원래 있던 것 중에 남들이 미처 찾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즉 시인은 발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발견하는 사람인 것이다.”라고 정의한 그를.

 

연탄 한 장’, ‘우리가 눈발이라면’, ‘그대에게 가고 싶다’, ‘연애 편지’, ‘너에게 묻는다.’ 등 십여 편이 중·고교 국어와 문학교과서에 실려 있다. [김동기 한서고 국어교사]

 

 

<시작노트> 안도현 시인

▲ 안도현 시인

백석이 몸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도꼬마리 씨앗 같다. 아니, 내가 백석의 몸에 붙은 도꼬마리 씨앗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통영을 갈 일이 있었는데, 젊은 통영 여자들이 모두 천희(千姬)’처럼 보였다. 백석을 베끼는일이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다.

 

꿈이 하나 있다. 기회가 된다면 백석이 거닐었던 중국 동북지방과 북한 땅을 가서 그의 흔적을, 혹시라도 그가 떨궈 놓았을지도 모르는 생의 부스러기를 찾아보고 냄새 맡는 것.

 

*도꼬마리 : 열매에 갈고리 같은 가시가 많아서 옷에 잘 붙으며, 한방에서 창이자(蒼耳子)라고 한다. *천희(千姬) : 백석이 사랑한 여인 난(.박경련)

 

 

 

안도현 시인 약력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10여권의 시집을 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백석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우리나라 대표적 시인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강서뉴스 김동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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