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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필/발칸의 역사 문화 기행

“발칸의 눈물”

기사입력 2018-08-18 오후 4:49:1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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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필/발칸의 역사 문화 기행)
“발칸의 눈물”



  1.분쟁의 화약고

 

▲ 김용필 소설가(전남 여수출신)
 발칸반도는 전쟁의 불씨가 항상 도사려 있는 화약고이다. 아드리아 해의 다민족, 다종교 국가들이 항상 으르렁 댄다.

 

옛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해체 되면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마케도니아·슬로베니아 6개 공화국으로 독립을 하였고 마케도니아,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포함하여 발칸반도라고 부른다. 발칸은 산이란 터키 말이다.

 

발칸반도는 아드리아 해 건너 66만 평방킬로미터의 작은 땅에 훈족, 슬라브족, 아라비아족, 라틴족, 게르만 민족등 30여개의 가난한 다 민족이 어울려 사는 곳이다.

 

유럽은 민족 이동이 많았다. 작센 공국의 게르만 민족이 영국으로 건너가서 앵글로 색손 인이 되었듯이 이곳 역시 민족 이동이 잦은 곳이다. 발칸을 지배한 민족은 라틴계의 로마. 슬라브계의 러시아. 에스토니아계의 그리스였고 나자르 족, 몽고족과 오스만 투르크 족이었다.

 

그래서 발칸의 역사는 전쟁으로 얼룩져 있었다.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살해로 시작한 1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 프랑스 연합국은 헝가리-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세르비아에 합병 시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을 탄생시켰다.

 

다시 1929년 연합국은 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탄생 시켰다. 그런데 소련은 이 지역에 세력을 확장하고 유고를 탄압하였다.

 

유고 1대 왕 알렉산더1세는 사회주의를 탄압하다가 1934년 암살당하고 유고는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다. 이때 티토가 나타나서 소련과 손잡고 친소 대 유고슬라비아를 탄생 시켰으나 소련의 관섭이 강해지자 티토는 1948년 소련을 적대하고 미국과 손잡고 연합국 편에 선다.

 

그런데 1980년 티토의 사망으로 유고슬라비아는 극한의 내전에 몰입 한다.

 

내전의 서막은 1991년 6월 27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제창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이들의 독립을 막기 위해 슬로베니아를 침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마침내 내전은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다시 보스니아, 코소보로 옮겨가면서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민족 간,종교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유고슬라비아 연방국은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신유고 연방·마케도니아로 분리 독립되었다. 지금도 코소보 분쟁으로 내전은 복잡하게 얽혀갔다.

 

*슬로베니아 내전- 슬로베니아인 들이 민족자치를 주창하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제창하자 유고군은 슬로베니아를 침공하였다. 10일간의 전투 끝에 유고군 이 철수하고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완성 하였다.

 

* 크로아티아 내전- 유고연방과 크로아티아간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자 1992년 4월 1유엔은 1만4000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하였다. 발단은 민족 보복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크로아티아인의 극단적 민족 단체인 우스타샤가 세르비아인 50여만 명을 학살하였다.

 

만약에 크로아티아가 독립할 경우 이 지역에 소수민족으로 남을 세르비아계 주민이 다시 학대를 받을까 우려하여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막으면서 내전이 발발하였으나 크로아티아의 승리로 독립을 하면서 끝났다.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전- 인구 450만 명의 보스니아는 이슬람계 43%, 세르비아계 32%, 크로아티아계 17% 등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이슬람 계와 크로아티아계가 독립을 강행하자 세르비아계는 이들과 민족별 분리 독립을 주장하였다. 결국 내전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가 이슬람 계와 크로아티아계 8600명을 학살하는 '인종청소'가 일어났다. 1995년까지 서로 25만 명이 목숨을 잃고 사라예보에서 독립을 하였다.

 

* 코소보 내전- 세르비아 공화국의 코소보 주의 주민 90%가 알바니아계인데 이들이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여 코소보 해방군을 조직하자 세르비아 보안군은 이들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알바니아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 곳 역시 '인종청소'양상을 띠었는데 유고슬라비아가 이를 묵살하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1999년 3월 24일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을 단행 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인명 피해는 아직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알바니아계 난민은 40∼50만이 인근 마케도니아 등지로 피난을 하였다.

 

발칸의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1995년 12월 파리에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의 3 대통령이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표면상 종식되었으나 크고 작은 30여 민족과 여러 종교가 혼재한 지역이라 여전히 그 분쟁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코소보 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에 가한 인공청소 학살을 주도한 도살자(발칸반도의 도살자)는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와 믈라디치, 라도반카라지치 였다.

 

  2.발칸 여행에서 인간의 굴절된 본색을 본다

 

설레는 발칸. 동부 유럽여행은 프라하에서 시작하여 발칸을 돌아 부다페스트와 비엔나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친구들은 70이 넘은 부부가 장시간 차를 타거나 걷는 발칸여행은 무리라는 염려에도 여행을 좋아하는 우린 여행을 속행했다. 이는 여행에 대비하여 평소에 체력을 길러놓은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장시간 비행길 타고 덩달아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걷는 일정에 좀 긴장을 하였다.

 

인천공항 제2청사에서 12.50분 체코 항공기를 타고 동부 유럽과 발칸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 안에서 일정을 살펴보았다. 여행국은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헝가리의 주요 도시를 관광하는 코스였다.

 

구체적인 관광지를 살펴보면 프라하, 훌루보카, 체스키크롬로프, 찰스브르크, 블레드, 폴리트비체, 세게트도니, 두브로브니크, 네움, 스플리트. 자그레브, 부다페스트, 비엔나, 프라하로 돌아오는 10일간의 여행이었다.

 

프라하까지 12시간을 날아가는 비행이었다. 체코와 우리나라의 시간차는 7시간, 2번의 기내식을 먹는다. 식사에 음료, 와인과 맥주. 커피까지 맛있게 먹는 나를 보고‘당신은 여행 체질이야.’그런데 조심은 한다. 기내에선 과한 음주는 안 된다. 언젠가 유럽 여행에서 와인을 많이 마시고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단명상태를 맞았다.

 

먼 여정은 잠을 자는 것이 최선인데 잠이 오질 않아 기내 모니터에서 영화를 보거나 항로 표지판을 지켜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랫 동안 좁은 좌석에 앉아 있기가 힘들어 몸을 비틀고 화장실을 자주 드나든다.

 

저녁 17. 30분에 체흐(체코)의 프라하에 도착 하였다. 곧장 우릴 태운 버스는 프라하 공항을 벗어나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체코의 여름 농장은 누런 보리밭과 파란 초지가 색동옷처럼 얽혀 있었다. 동부 유럽은 농목축업을 하는 나라라서 들판엔 곡식보다는 초지가 많았다. 마침 수학 철이라 들판은 누런 밀, 보리, 귀리가 노랗게 잘 여물어 있었다.

 

유럽의 모든 나라는 넒은 평야와 들판을 가졌음에도 논농사를 짓지 못해 밭농사에 의존한다. 이유는 토질이 석회암 층이라 물이 고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후도 건조하다. 비가 오면 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고온건조하다. 따라서 그늘에 있으면 덥지가 않다. 유럽은 28개국이 쎈켄조약으로 공동경제 연합에 가담해 있어서 경제활동이 제약을 받는다.

 

다만 베네룩스 3국은 단일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동부유럽은 농업국가라서 농산물이 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국민소득 45,000불의 관광 부국이다. 동부유럽 국가들은 가난하여 풍부한 경제 활동은 못하지만 세금을 많이 내고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 혜택을 받기 때문에 먹고 살기엔 불편이 없다.

 

프라하 공항에서 2시간 30분을 달려 훌루보카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서양의 아침 호텔 식사는 대륙식사인 인터내셔널 블랙퍼스트와 아메리칸 블랙퍼스트, 보통의 호텔식 식사로 구분한다. 유럽은 물이 나빠서 음료수를 물대신 즐겨 마신다. 농사는 농산물을 얻는 것이 아니고 고기를 얻기 위하여 가축먹이로 목초를 가꾼다. 넓은 토지에 건초를 얻기 위한 초지가 대부분이다.

 

  (1) 체코의 훌루보카에서 신성 로마제국을 본다.

 

여행은 현지의 문화와 생활을 돌아보는 새로운 체험에서 자아 발견과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여행은 혼자 하는 시간에 진정한 나를 보게 된다. 인간의 세계 여행은 1699년 영국에서 대륙을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에서 시작 하였다.

 

섬나라 영국은 유럽대륙으로 진출하는 것이 로망이었고 대륙으로 가는 것을 생의 최고 영광으로 알았다. 아일랜드인 들이 처음 집단으로 유럽 여행을 시도하였다. 섬사람들의 대륙 진출은 엄청난 삶의 질을 바꾸었다. 오직 바다에서 자연과 격투하는 시달림을 탈피하여 대륙으로 나가서 사람답게 사는 것을 체득한 것이다.

 

영국의 부는 그렇게 창출 되었다. 아일랜드의 풍습은 한국과 어쩜 그렇게 비슷한지 모른다. 동부 유럽인은 슬라브족과 게르만 족, 라틴족이 혼성으로 거주하면서 별 문제가 없는데 발칸에선 다민족이 다종교가 얽혀 문제가 복잡했다.

 

로마제국 붕괴 후 신성로마제국인 탄생은 유럽의 문화 판도를 바꾸어 버렸다. 독일이 주도한 신생로마제국은 프랑크 왕국 (800년 )으로 세력 변천이 일어나서 962년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 보헤미아 (1002년 )왕국, 아를 왕국 (1032년) 교황령 (1177년)이 되었고,

 

네덜란드 (1648년), 모나코 (1648년). 밀라노 공국 (1648년), 사보이아 공국 (1648년), 스위스 (1648년), 제노바 공화국 (1648년), 토스카나 대공국 (1648년),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 (1648년) 로 다양하게 분리 되었다가 라인 동맹으로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존재 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독일 왕국, 보헤미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 이탈리아 왕국에서 3대 가문인 (독일의 로젠베르크 가문, 보헤미아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이 주체 세력으로 등장을 하였다. 동부유럽은 보헤미아 왕국으로 존재 하다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국으로 패권을 이어 받았다.

 

프랑스가 대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자 나폴레옹이 프랑스 권력을 잡았을 때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동맹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였으나 나폴레옹신성로마제국을 박살내고 1801년 뤼네빌 조약으로 라인 강 서안의 영토를 몽땅 잃어버렸다.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2세는 실권을 잃고 1804년 레겐스부르크에서 나폴레옹에 충성하고 나폴레옹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란츠 2세는 자신의 유고시 후계자가 황제 선거에서 당선될 가망이 없고 영지마저 잃었으니 오스트리아 대제국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는 겨우 합스부르크 본국인 오스트리아 왕으로 대표 타이틀을 유지하였으나 1804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치고 1806년 6월 독일을 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해체해 버렸다.

 

7월 파리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16개 연방이 나폴레옹에 충성하는 라인 동맹을 결성 하였다. 라인 동맹의 연방들의 힘에 밀려 프란츠 2세는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및 제국에서의 기타 지위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840여 년 동안 이어온 신성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하였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프로이센 마지막 총리 카를 폼 슈타인은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애착은 더 커서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재통합을 완수한 후 이 나라는 신성로마제국의 영광을 계승한‘독일 제국’이라고 선포하였다.

 

  (2)블타바 강의 체스키크롬로프

 

오스트리아 국경 지대의 체스키크롬로프는 체코의 제2도시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고문화 보존 역사도시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다. 블타바 강변 언덕에 붉은 지붕의 성들이 동화 같은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미로의 좁고 긴 골목에 아기자기한 수공예품 가게들이 즐비하게 중세의 거리를 연상케 한다. 신성로마 제국의 신분은 왕과 기사, 성직자가 가장 신분이 높았고 상인 교수 작가들은 신분이 낮았다.

 

이곳 로젠베르크 가문이 이룬 합스부르크 왕국의 수도이며 영주의 정원 도시이다. 정신병 왕자와 이발사의 딸이 사랑을 나누던 이발사의 다리와 벽에 모자이크를 그렸던 스크라비토 벽화의 중앙광장, 망토의 다리. 바로메타멜 성당의 전망대의 종탑이 볼만하다.

 

누드화를 그리는 에곤 쉴레 아트 홀이 망토의 다리에 쓸쓸히 빛이 바래 있었다. 1842년에 세운 블타바 강변의 필스너 맥주 공장은 라거맥주의 원조이며 독일맥주의 원조이다.

 

유럽에서 가장 고전적인 건축물이 남아있는 체시키 크롬볼트는 12세기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이며 중세 르네상스가 멈춰 버린 도시이다. 블타바 강의 태극 모양 형상은 최고의 요새를 만들었다. 체시키크롬성은 3대 가문(체시키크로니 가문, 로젠베르크 가문, 비토코비치 가문) 이 다스린 성이다. 이곳에서 3대 가문은 맥주(버드 와 이져)를 생산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인근 로켓 캐슬은 브람스가 즐겨 찾던 온천도시인데 독일의 문호 괴테가 16세 소녀와 연애를 즐기던 곳이다.

 

우린 로켓 캐슬에서 사도세자의 운명같은 비극의 왕자를 만난다. 그는 땅속의 요정에 갇혀 죽었다. 카를 4세가 요정과 연애하는 아들을 이 감옥에 가두고 쇠창들 속에 넣고 고문을 한다. 그는 그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3)모짜르트의 짤스부르크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보헤미아 공국의 중심이었다. 헝가리의 영토였다가 1차 대전 때 독일에 부속 되었고 2차 대전 땐 같은 슬라브 민족이란 정체성으로 소련 편에 붙었다가 독일에게 망하고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 하였다. 언어는 체코어와 오스트리아 어를 쓴다. 짤스브르크는 소금이 도시라고 한다. 암염이 많이 나는 곳으로 중세엔 부자 도시로 이름을 떨쳤다.

 

짤스브르크의 마라 벨 정원은 뮤지컬 사운드 어브 뮤직의 무대이다.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가 태어난 고장이다. 그는 블타바 강변에서 태어났다. 이곳의 게트라이데 거리는 모차르트를 연상하는 쇼핑거리로 활황을 띠고 있었다. 시가는 고풍스런 건물과 가게로 차 있다. 모토카를 타고 호엔잘츠브르크 성채에 올라가서 시내를 조망하는 풍경은 환상적이다. 너무나 자연이 아름다운 도시를 볼수 있다.

 

다음은 짤스부르크에서 3시간 30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줄리안 알프스의 보석이라는 슬로베니아의 볼 레드로 이동을 한다.

 

알프스는 줄리안 알프스와 디나르 알프스 산맥으로 구분한다. 줄리안 알프스는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로 가는 산맥이고 디나르알프스는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 발칸 반도의 아드리아 해변을 타고 알바니아 그리스로 내리는 산맥이다.

 

  (4) 신선의 나라 볼레르 성

 

볼레르는 알프스의 눈이라고 한다. 슬로베니아의 줄리안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호수 공원이다. 1948년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 발칸의 스위스라고 부르는 볼레르 호수는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다. 주변엔 절벽에 볼레르 성이 있고 전 유고 대통령이었던 티토의 별장이 있는 곳이다. 슬로베니아는 200만 인구에 국토 크기는 전라남도 정도다. 1903년 유고 왕국이 해체 하면서 6개국으로 분리되었다.

 

1991년 완전 독립, 수도 루불리나 는 ‘사랑의 도시, 알프스의 눈동자, 줄리아의 사랑’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국민 소득은 3만 불, 맑고 깊은 빙하호수가 거울처럼 맑고 푸르다. 중세 건물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그대로 아기자기한 고풍을 지니고 있다.

 

볼레르 성에서 호수를 바라보고 서면 신선의 나라에 선 것 같다. 성각에서 450년 전통의 구텐베르크의 인쇄소와 중세 수도사들이 만든 와인 공장과 와인 카페를 만난다.

 

호수안의 리폴리아 성당에서 바라보는 줄리안 알프스의 빙설은 너무나 아름답다. 1차 대전 때 헤밍웨이가 이곳 속사 강 전투에 참전하여 이곳의 아름다움에 취해 지옥 속의 낙원이라고 하였다. 1차 대전 때 이탈리아와 전투가 29번 일어났는데 이곳에서 12번째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볼레르 호수 중앙에 섬이 있는데 섬까진 배를 타고 간다. 볼레르 섬의 99계단을 올라가며 1144년에 세운 리폴리아 성당이다. 로마 교황이 신성로마 황제에게 준 성이었다. 성당에서‘소원의 종’소릴 들을 수 있다.

 

*소원의 종- 이곳 전쟁에서 남편을 여위 부인이 남편을 그리는 심정으로 종을 만들어 볼레르 성당에 기증하러 가다가 물에 종을 빠뜨려 버렸다. 그 종은 호수의 깊은 곳에서 아침이면 힘차게 울린단다. 그 소리가 물위로 잔잔하게 퍼져 나가 들린다. 누구나 이성에서 결혼을 하고 그 종소릴 들으며 평생 이혼을 안 한다는 것이다.

 

서양과 동양은 생각의 차가 매우 크다. 개인생활과 풍습에서 판연한 차별을 보인다. 예를 들어 결혼 후 서로가 능력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헤어지는 것이 서양인의 상례다. 부부이면서 내가 너를 위하여 희생할 수는 없다. 같이 일을 해야만 부부 행세를 할 수 있다. 경제적인 능력이 없으면 헤어져야 하고 이혼하면 모든 재산권이 여자에게 넘어 간다.

 

자유 섹스로 혼외 자녀가 50%가 넘는데 이들은 국가가 교육하고 양육해 주기에 부모는 별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세금을 많이 내는 대신 복지가 잘 되어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수입의 50%는 세금으로 나간다. 그것으로 국가가 사회 보장을 잘 해줘서 개인은 쓸 돈은 없지만 걱정 없이 살아간다.

 

서양과 동양의 생각 차는 인연에서 볼 수 있다. 스침도 동양에서는 인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양은 길을 가다가 스치거나 부딪치면 화를 버럭 낸다. 동양은 인연, 서양은 싸움거리다. 그래서 서양에서 스치면 반듯이 사과를 해야 한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동양적 사고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알프스의 낙원 볼레르에서 4시간 버스로 달려 국경을 넘으면 크로아티아로 들어간다.

 

  (5)호수공원 플리트비체

 

슬로베니아에서 고속도로 국경을 타고 넘으면 크로아티아에 이른다. 유고연방에서 가장 강력하게 세르비아에 대항한 나라가 크로아티아다. 아드리아 해의 숨은 보석 크로아티아는 자연과 인간이 정지된 시간 속에 사는 느낌을 준다.

 

정전 상태로 국경이 그어져 초승달 같은 생김새을 가지고 줄리아 알프스의 아름다움을 아련하게 품어준다. 북서쪽에 슬로베니아, 북동쪽에 헝가리, 동쪽에 세르비아, 남쪽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서남쪽에 아드리아 해를 접한다. 크로아티아 남부에는 달마티아 해안이 아드리아 해에 길게 이어져 있고, 디나르알프스 산맥이 달마티아 해안을 따라 뻗어있으며, 동부에는 도나우 평야가 펼쳐져 있다.

 

남부 해안은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고 북부 내륙은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인다. 면적은 56,594㎢로 한반도의 4분의 1 크기이고 인구는 449만 명에 불과하다. 그중 수도 자그레브에 70만 명이 살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역사는 일리아족의 역사이다. 로마의 켈트 족과 교류하던 일리아 족은 로마 제국에게 영토를 빼앗겠다. 4세기 초에 고트 족, 5세기에 훈 족의 침입을 받았고 7세기경에는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슬라브계가 대대적으로 유입되었다. 이로써 슬라브 족 이 많다. 7~9세기에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925년에 토미슬라브 공이 통일된 크로아티아 왕국을 최초로 수립했다.

 

1102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헝가리-크로아티아 국가를 성립하였다. 1526년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에 패배하면서 1699년까지 크로아티아 대부분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크로아티아는 1918년까지 헝가리와 합병해 있었지만 법적으로는 독립 왕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크로아티아는 자연이 빚어낸 천혜의 아름다운 바다·산·평야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대충 관광지를 찾아보면 바다를 끼고 있다.

 

0.자그레브 - 크로아티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반 옐라치 광장을 중심으로 광장 북쪽 언덕의 구시가와 남쪽의 신시가에 볼거리가 모여 있다. 굴절버스와 트램의 전깃줄 따라 질서 있게 흐른다.

 

0.플리트비체는 호수의 국립공원이다. 크로아티아 최고의 세계적인 폭포수 국립공원이다. 16개의 호수가 크고 작은 90여 개의 폭포들로 연결하여 절경을 이룬다. 1979년 세계 자연 유산에 등재 되었다. 푸른 석회암 호수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더위를 시원하게 식혀준다.

 

0. 스플리트 는 아드리아 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휴양 도시.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궁전을 세웠다.

 

0. 두브로브니크 ‘아드리아 해의 숨겨진 지상낙원’으로 불리는 해안 도시. 중세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은퇴자의 휴양도시로 알려져 있다.

 

  (6)호텔의 도시 세게트 도니

 

호수공원을 둘러보고 3시간여 아드리아 해를 따라 계속 달려가면 숙박의 마을 세게트 도니 해변에 도착한다. 세게트 도니는 줄리아 알프스를 타고 내려가는 길목에 발달한 숙박도시다.

 

  (7)지상의 천국 두브로브니크

 

버나드 쇼가 두브로브니크를 지상의 천국이라고 불렀다. 크로아티아 끝 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도시이다. 발칸의 아드리아 해는 에게 해를 거쳐 지중해로 나간다. 굴양식이 번창한 곳이다.

 

종교도 다양하다. 베네치아와 더불어 아드리아 해의 해상무역의 중심지다. 바이런이 즐겨 찾던 도시이며 건축가 오노프리오는 알프스에서 물을 수로로 끌어다 성채 안에서 수돗물로 사용하게 하였다. 극작가 드로지치는 광장이 있는 플리치 거리를 매일 드나들며 술을 마시며 사랑했다.

 

아름다운 자연이 개발 안 된 채 남아있는 유일한 땅이었다. 문명의 물결을 받지 못하고 내전으로 발전을 못한 지역이지만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자연 속에 인간은 집을 짓고 자연처럼 존재한다.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었다.

 

두브로브니크는 9세기에 발칸과 이탈리아가 교역한 무역의 중심지였고 13세기엔 베네치아와 쌍벽을 이룬 해상 금융 도시였다. 1667년 대지진으로 파괴 되었으나 나폴레온 전쟁 때 옛 번영을 다시 누렸다. 잔혹한 유고. 그들은 유고 내전 때 이 도시에 포탄을 퍼부어 완전 파괴 하였다. 그런데 1999년 복원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아람다운 자연 환경 때문에 세계의 은퇴자들이 모여드는 도시다. 시청에서 정책적으로 은퇴자들이 거주할 주택과 리조트, 펜션을 제공하고 땅을 사서 집을 지을 수 있게 허락하였다. 두브로브니크의 성채와 성각은 중세 베네치아에 버금가는 부와 영화를 누렸던 곳으로 지금도 살기에 불편한 점이 없다.

 

성채 안의 도시는 고대 건축의 풍경을 지닌 고풍스럼과 푸른 바다, 아름다운 해안, 붉은 색 지붕과 유락시설이 이 도시의 매력이었다. 성채뒤 스로지산에서 바라보는 두브로브니크 성각은 환상적이 미색을 드러낸다. 스로지산의 정상엔 크로아티아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여름 축제가 열리면 스폰자 궁전과 스트라톤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크로아티아는 바다가 아름다운 나라이다.

 

눈앞의 아드리아 해의 크로나다 섬은 콜럼버스가 활동한 무대이다. 이곳에 나체족들이 발가벗고 지상의 낙원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은 장수촌으로도 이름 나 있었다. 이는 발칸식초를 즐겨 먹기 때문이란다. 세계 장수 건강식품은 요쿠르트, 김치, 나토, 랜드콩, 올리브 드레싱. 레드 와인. 발칸식초를 들수 있다.

 

  (8)국경의 도시 네움

 

크로아티아를 둘로 갈라놓은 보스니아의 국경도시다. 통과 할 때 2번 여권검사를 받는다. 두브로브니크에서 한 시간 반쯤(21km) 해안을 달려가면 보스니아 국경도시 네움에 도착한다. 검문을 받고 보스니아 네움에서 도착하여 30분을 달리면 다시 크로아티아 국경에 이룬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서로 민족분쟁을 일으키는 앙숙이다. 이곳을 지날 땐 두 번의 국경 검문을 받는다.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 네움을 통과하여 두브로브니크로 가서 몬테네그로의 코토르 까지 내 달릴 수가 있다. 네움은 크로아티아를 양분하는 보스니아 땅의 언덕에 세워진 아름다운 해안도시다.

 

마르코 폴로가 탄생한 곳이다. 그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쿠르촐라 섬의 오레비치에서 1254년에 태어났다. 17세에 행상이었던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중국을 갔다가 길에서 7년 원나라에서 18년을 보내다가 42세에 베네치아로 돌아와서 동양의 이야기를 풍자하는 뻥을 쳤다.

 

그는 배를 타고 베네치아에서 이란을 통하여 몽고로 가서 중국 일본까지 여행을 하였다. 그는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의 간청으로 원나라에 머물며 장사를 하였다.

 

원나라 공주가 이란으로 시집을 갈 때 그는 길 안내자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쿠빌라이가 죽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동방견학 이야길 하였는데 친구인 노스비첼라가 동양의 향수라는 제목으로 몽고와 중국 문화를 이야기로 썼다.

 

그때 한참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이탈리라 패권 전쟁을 치렀고 노스비첼라는 베네치아 군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포로가 되어 감옥소 생활을 하면서 글을 썼다. 그의 이야길 듣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중국으로 가는 모험을 즐겼다.

 

마르코 폴로는 허황한 거짓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그를 모험가 마르코 밀리오네라고 놀렸다. 그러나 사실 규명을 하려고 수많은 밀리오네들이 배를 타고 동방으로 향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콜럼버스 였다.

 

아드리아 해의 줄리안 알프스는 석회암석의 아름다운 고산풍경을 자아낸다. 그 아래 넓은 평원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황무지다. 간혹 물길이 좋은 곳에 귤나무와 무화가 나무, 올리브 농사를 짓기도 한다.

 

바이런은 이곳의 경치에 반하여 돌아가고 싶지 않은 천국이다. 작가는 보는 만큼 체험을 기록한다. 크로아티아는 자연개발을 거의 방치한 나라로 삶 자체가 자연이다. 자연은 문화를 만들고 문화는 인간을 만든다. 이곳은 강풍이 거센 곳이라서 풍차로 전기를 만든다. 해안언덕에 수백 개의 풍차가 돌아가고 있었다.

 

네움의 국경을 오고가면서 도살자들이 광분한 학살의 보스니아 내전을 일깨운다.

 

  *보스니아 내전은 인간 살육장이었다.

 

19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하자 그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가 독립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창설하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선언은 곧장 내전으로 번졌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계 48%. 세르비아계 37.1%, 크로아티아계 14.3%, 기타 0.6%였다. 보스니아계는 주로 이슬람교를 믿고, 세르비아계는 주로 세르비아 정교를 믿었다. 크로아티아계는 로마 가톨릭교를 믿었다. 그런데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했고 세르비아는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 남기를 희망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언하자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 융단 폭격을 가했다. 그리고 세르비아군과 민병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사는 이스람교인 1만 여명을 살해 했다. 학살의 주인공은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믈라디치 장군과 라도만 카라지치이다.

 

  *스레브레니차의 이슬람 학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동쪽 세르비아 국경 지대의 스레브레니차는 이슬람교도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내전이 끝날 무렵인 1995년 7월에 유고의 세르비아 민병대는 국제 연합 보스니아 평화 유지군을 몰아내고 이곳의 이슬람교도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7,000명이 넘는 이슬람교도가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최악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9)달마시안의 꽃 스플리트

 

아드리아 해에서 유일하게 로마 유적을 볼 수 있다. 크로아티의 제2도시. 달마시안의 황홀한 꽃 디오클레티안 궁전은 글고리우스의 상과 리바 거리로 유명하다. 스플리트는 아드리아 해에서 이탈리아와 가장 교역이 활발하고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로마 문명을 가장 많이 받았고 그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다.

 

중세부터 발칸을 지배한 나라는 게르만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그리고 이슬람의 터키이다. 이곳은 작가들이 선호하는 휴양지이다. 차탈리 부인의 사랑을 쓴 D.H 오로렌스는 이곳에서 작품을 썼고 그는 이 작품에서 중산층 사람들의 위선과, 하층민들의 비애를 묘사하고 현대 문명과 복잡한 일상성 속에 묻혀버린 '사랑'의 원초적인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대담한 성행위 묘사로 지나치게 외설적이지만 그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그려냈다. 그는 실제 1차 대전 때 스플리트에 참전했다가 성불구가 되었다.

 

디오클레티안 궁전은 로마 교황청을 그대로 묘사한 궁전이다.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궁전이다.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원래 기독교를 부인하여 기독교인을 대학살 하였다. 그러나 313년 글레고리우스 딘이 밀라노 칙령으로 크로아티아에서 기독교를 허락받고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황제로 책봉을 받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 황금의 문으로 불리는 북쪽 문을 통해 나가면 약 4.5m 높이의 그의 모습이 큰 동상으로 서 있다. 자세히 보면 발가락이 다 닳아 있는데, 이 동상의 왼쪽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는 380년 기독교를 국교로 하고 그 공으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황제 칭호를 받은 물이다. 476년 서로마가 망하고 1300년 동로마가 망할 때 까지 스플리트는 카톨릭의 중심 도시였다.

 

로마의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은퇴 후 자신의 고향에서 지내기 위해 295년부터 305년에 걸쳐 건축했다. 유럽 각지에서 가져온 최상급의 대리석과 석회암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스핑크스, 기둥까지 가져와 장식하는 등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동서남북의 각 방향으로 금속의 이름을 붙인 문이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원하는 대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지 못하고 권력 투쟁에 휘말려 어지러운 말년을 보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 황제들도 한동안 이곳을 별장으로 편하게 사용했다.

 

중세의 건물은 사라지고 지금의 길이나 광장은 새로 만들어 졌으며, 교회와 종탑 등이 추가로 건축 되었다. 궁전의 중앙에는 열주 광장이 위치하고 있다. 광장 양쪽에 있는 계단에 앉아 있으면 잠시나마 로마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광장은 궁전의 4개의 문을 통해 외부로 연결된다. 광장의 동쪽으로는 은문(Silver Gate)이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전통 시장을 만날 수 있고, 서쪽으로는 철문(Iron Gate)을 지나 나로드니 광장으로 갈 수 있다. 광장의 남쪽으로는 지하로 연결된 계단이 보이는데 이곳으로 내려가면 동문(Bronze Gate)을 통해 항구가 보이는 해변으로 나갈 수 있다. 북쪽문은 정문이다.

 

  (10)발칸의 허부 자그레브

 

크로아티아의 수도이다. 스플리트에서 해안을 벗어나 내륙으로 4시간을 달려 자그레브에 도착한다. 인구는 80만, 과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지배를 받았던 도시로 동유럽의 비엔나, 부다페스트, 류블라냐, 문휀, 베네치아로 연경하는 허부 도시다. 고전의 전차가 주요 교통으로 활용한다. 도로는 전차, 버스, 사람이 얽혀 다니는 것이 놀랍다. 노천카페가 아주 발달한 곳이다. 13세기엔 헝가리에 지배하였고 후에 독일의 100년 동안 지배를 받았다.

 

성마르코 성당의 지붕들은 모자이크로 설계 되었다. 이는 크로아티아의 국기이며 자그레브의 중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달마시아 왕국과 슬로베니아 왕국이 번성을 누렸다. 니콜라이 테슬리아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그는 에디슨 연구소에서 교류 전지을 발명하여 교류전기로 전기 자동차를 발명하였다. 에디슨과 불협으로 그는 독립을 선언하고 에디슨 회사를 그만두고 조국으로 돌아와서 전기자동차 연구에 몰두 하였다. 발칸 반도를 디나르알프스라고 한다. 달마스 산맥은 해안과 대륙을 구분하고 가로 지른다. 유럽인들은 비로 달마스의 디나르 알프스 여행을 즐겼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사람은 민영환이다. 그는 해천 추범이란 여행기를 남겼다. 그 후 윤치호도 세계 일주를 하였고 김춘삼도 세계 일주를 하였다.

 

1999년 발칸의 내전으로 유고슬라비아의 코소보(슬라브족)에서 알바니아(터키계)와의 전쟁으로 주변국의 내전이 시발하였다. 미국이 개입하여 세르비아를 폭격함으로서 티토가 죽고 유고 내전이 종식되면서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였다.

 

  (11)도나우강의 진주 부다페스트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5시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들어갔다. 버스는 넓은 평원을 달려 발라톤 호수를 끼고 돌아 도나우강을 타고 내리며 황금 고도 부다페스트에 도착 하였다.

 

  *헝가리의 역사

 

헝가리인은 우랄산맥 남서쪽 볼가 강 유역 부근에 정착하였던 마자르족이다. 5세기 경 마자르족은 훈족의 침입을 받아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밀려 살다가 896년 아르파트가 현재의 땅에 헝가리를 탄생시켰다.

 

오랜 시대에 걸친 민족 대이동을 끝내고 아르파트가의 게저가 봉건국가를 형성하고 그 아들 이슈트반 1세(997∼1038)는 그리스도교를 받아 통일 국가를 형성 하였다. 그러나 1241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화 되었고 비로소 15세기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왕 때 중부 유럽 제일의 강국이 되었다.

 

헝가리의 비극은 1302년 계승할 왕손이 끊겨 공주와 사위들이 왕위를 계승한 결과 몽고의 외침을 받아 망했다. 그러나 15세기에 마차시 국왕이 헝가리의 르네상스를 이루어 냈다.

 

그러나 1526년 다시 오스만 투르크에 패한 후 약 2세기에 걸쳐 국토의 대부분이 투르크에 점령당했다. 서부와 북부 지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세력권에 들어갔고 동부의 트란실바니아 지방만이 투르크의 보호 아래 반독립 공국이 되었다. 17세기 말 합스부르크가가 헝가리를 완전 지배하였다.

 

그 후 트란실바니아의 라코치 페렌츠 2세가 반 민족반란(1703∼1711)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지배 하였다. 비로소 1848년에 독립전쟁으로 헝가리가 성립되었다. 헝가리는 1차 대전 때 독일편에 섰다가 전후 연합군에 의해 영토가 분해되었고 2차 대전 때 다시 독일편에 섰다가 망했다.

 

  * 부다페스트의 여행코스

 

부다페스트 여행은 슬픈 도나우강에서 시작된다. 부다페스트는 남쪽의 부다와 북쪽의 구시가지인 페스트가 합한 도시다. 부다지역 여행코스는 어부의 요새, 겔레트르 언덕, 마치시 궁전, 부다의 왕궁을 볼 수 있고 페스트 구도심 지역은 성 이슈트반 성당, 영웅광장, 금문교등 교각과 도나우강의 야간 투어가 볼만하다. 금문교를 비롯하여 도나의 강의 다리에 쏘아올린 조명은 황금교로 변색한 명물이다.

 

헝가리는 와인 생산의 최적지이며 도나우강 유람은 환상적이다. 동유럽의 시내 교통수단은 거의 트램을 이용한다. 특히 부다페스트와 프라다는 트램의 전형적인 교통국가로 교통사고도 잦다. 유명한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도 트램에 치어 죽었다. 사람은 가고 문화만 남는다.

 

헝가리 유적에서 느껴지는 인상이다. 헝가리는 농경이 잘 정돈된 농업 국가이며 포도가 주산품이다. 체코의 맥주. 헝가리의 포도주는 유명하다.

 

헝가리는 여권이 신장된 도시로 여자가 가장으로 가계를 꾸려간다. 남자는 이혼하면 빈 몸으로 떠난다. 대신 여자는 자식을 책임지는 의무를 가지면서 재산권을 행사한다. 부다페스트는 음악의 도시기도 하다. 헝가리 환상곡을 지은 리스트는 헝가리 출신 음악가이며 애국가를 지은 안익태 선생도 1938년부터 1941년까지 헝가리 리스츠 음악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헝가리는 금 독수리(푸륜)을 우상으로 하고 말을 사랑한다. 홀트가르 평원에선 독수리 떼를 비롯한 새들이 낙원을 볼수 있고 헝가리 대평원엔 야생마들이 떼 지어 다닌다. 이곳에서 매사냥 하는 풍경을 자주 불수가 있다. 도나우강의 지루인 피셔 강에선 고기잡이 천국을 이루고 에베스에선 물고기가 사는 온천이 있단다.

 

  3.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예술을 만나다.

 

  (12) 예술가들의 천국 비엔나

 

비엔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다 . 헝가리의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가는 들판엔 끝없이 노란 해바라기 밭이 펼쳐져 있었다. 들판에 이어진 풍력발전기용 풍차가 힘차게 돌고 있었다. 자연 친화적인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면적은 87,000 평방킬로미터. 국민총생산은 47,000불,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프랑코 왕국(프랑스)에서 독립한 합스부르크 왕국이 탄생하였다.

 

오스트리아는 5세기 로마가 멸망한 뒤 게르만족과 투턴족의 지배를 받았고 6세기 말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전 유럽을 통일하면서 오스트리아도 지배 하였다. 97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는 오스트마르크를 바벤베르크 가문에게 다스리게 하였고 오토 2세(973~983)가 바이에른 후작의 영토로 장악하고 오토 3세( 983~1002)가 동쪽의 나라 오스트리아를 탄생시켰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바벤베르크 왕가는 270년간 영토를 확장시키고 빈을 중심으로 경제와 문화를 크게 번영시켰고 수도원과 성당 등 중요 문화재들을 건축하였다. 1278년 합스부르크가의 초대 황제 루돌프 1세(1273~1291)는 영유 지를 넓혀 나갔다.

 

그런데 바벤베르크가의 후손이 끊기자 1278년, 스위스의 백작 루돌프를 합스부르크가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가는 번성하여 14세기 들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후 650여 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시대를 열었다.

 

15~16세기에는 정략결혼을 통해 이탈리아의 시실리와 나폴리,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방, 네덜란드와 스페인, 헝가리, 보헤미아 왕가와 결혼하여 많은 영토와 세력을 얻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16세기 초 카를 5세 때 제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프 2세가 스페인과 네덜란드 영토를, 카를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헝가리, 보헤미아 등을 차지하면서 나라는 스페인-네덜란드 노선과 오스트리아-독일 노선의 여왕이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이었다.

 

  * 다산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18세기 초 오스트리아는 카롤의 후손인 카를 6세가 아들이 없어서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를 계승시켰다. 그녀는 남편 프란츠 1세와 공동으로 국가를 통치하여 행정 제도와 교육·문화면에서 개혁 정책을 펴고 군대 육성에 주력한다.

 

그녀는 다산의 여왕이었다. 금술이 좋아 자녀를 열여섯 명이나 두었는데, 그중 맏아들 요제프 2세는 어머니의 개혁 정책을 더 강력하게 펼쳐 계몽 군주라 불렸으며 오스트리아의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가 프랑스 혁명 때 목숨을 잃은 불행한 여인이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그녀를 추출하기 위하여 그녀를 사치와 허영에 싸인 왕비라고 비하 하여 마침내 죽임으로 몰았다.

 

요제프 2세의 뒤를 이은 프란츠 2세는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는 세력과 손을 잡고 개혁을 반대하며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지만, 심각한 피해를 입고 신성 로마 제국오스트리아는 멸망하였다.

 

프란츠 2세는 합스부르크가의 정략결혼 정책에 따라 자신의 딸을 나폴레옹과 결혼 시켰으나 나폴레옹의 힘이 약해지자 영국, 프로이센 등 연합한 혁명군이 1814년 나폴레옹을 몰아내었다.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오스트리아 내부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 헝가리 왕국을 필두로 여러 왕국이 오스트리아를 위협하였다. 그리고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양쪽의 국왕을 겸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이 성립한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1공화국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죽음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 대전 후 이어지는 혁명으로, 합스부르크 왕가는 문을 닫는다.

 

왕정이 사라지고는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여 18세의 젊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에는 잇달아 비극이 일어났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비가 암살되고 황태자는 자살했으며, 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독립주의자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가 해체.

 

마침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와 전쟁이 시작되고, 독일이 오스트리아 쪽에,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가 세르비아 쪽에 서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 사상자만 1천만 명에 이른 이 전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헝가리와 체코, 슬로바키아가 각각 독립하여 오스트리아는 제국 시대에 비해 영토는 8분의 1로 줄어든 상태로 독립하였다. 인구역시 9분의 1로 줄어들었다.

 

1918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 카를 1세가 왕위에서 물러나며, 임시 국민 회의에 의해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과의 연합이 금지되어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으로 탄생하였다.

 

  *예술가들의 천국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는 화가와 음악가들이 활동하는 나라였다. 빈 예술가 모임이 있는데 대표적인 화가는 구스타프 클림트 (1862년 - 1918)와 에곤 쉴레, 한스 잣카를 들수 있다. 에곤 쉴레는 비엔나 탈퇴 운동을 주장한 작가였다. 클림트는 여성의 나상을 즐겨 그려 에로티시즘의 미를 나체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대표적인 그림,‘키스’는 세계에서 가장 고가로 팔린 작품이다. 그리고 에곤 실레는 깡마르고 병든 여성들의 심리를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그의 그림들 속에는 불행과 박탈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그는 비정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붕괴 된 자신의 어린 시절이 묘사 하였다. 그러나 에곤 쉴레는 겨우 28살에 요절한 화가였다.

 

그의 그림은 젊음과 죽음, 에로스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고 레즈비언과 양성의 성징을 강하게 나타내었다. 이는 전쟁으로 상처 입은 시대의 감수성을 적나라하게 묘사 하였다. 그는 일찍 요절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훌륭한 화가였다. 미스터리 하고 신비한 에로스의 예술 세계가 에곤 쉴레의 예술 세계이다.

 

에곤 쉴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비엔나는 유럽에서도 가장 완고한 예술가들이 아카데미를 틀어쥐고 있었다. 늙은 그들은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을 외면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아카데미의 권위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비엔나의 화단에 새로운 기운을 고취시킬 수 있는 운동이 일어났다. 비엔나 분리파의 등장이었다.

 

에곤 쉴레( 1890년 6월 12일 ~ 1918년 10월 31일)는 초상화, 자화상, 풍경화, 고통에 사로잡힌 인물들을 즐겨 그린 표현주의 화가였다. 초기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빈 분리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내밀한 관능적 욕망, 인간의 실존을 둘러싼 고통스러운 투쟁에 관심을 기울이며, 의심과 불안에 싸인 인간의 육체를 왜곡되고 뒤틀린 형태의 거칠게 나체화를 그렸다.

 

주요작품은 “옷을 벗고 있는 여자, 자화상, 추기경과 수녀, 죽음과 소녀 (1915), 포옹 (1917), 가족 (1918년)이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비엔나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쿤스틀러 하우스'를 탈퇴하고 요셉 호프만과 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된다. 비엔나 분리파들은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 집착하는 모든 악취미에 대해 반기를 든다.’라고 새로운 사상을 부르짖었다.

 

들은 고질적인 상업 예술의 중압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감각의 작품을 그리며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탈출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는 예술을 철폐하여 도시 계획이나 건축, 가구, 생활필수품 등 모든 예술을 창조 하자는 총체적 개혁을 선언하였다.

 

  *나치스 점령과 제2차 세계 대전이후의 오스트리아

 

전쟁에 패한 오스트리아는 승전국에게 막대한 전쟁 보상금을 치러야 했다. 이 상황에 세계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고 정치적으로도 혼란에 빠지면서 1920년대 말, 오스트리아에도 나치스가 생겨난다.

 

1934년, 나치스 당원이 총리를 암살하고, 1938년 오스트리아 나치정부가 탄생 하면서 독일 나치스에 군대를 보내면서 독일에 합병되어다. 1945년 독일이 패망하자 독일을 도왔던 오스트리아는 다시 한 번 패전국이 되었고, 연합군과 소련군은 오스트리아와 빈을 독일과 베를린처럼 네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점령 하였다.

 

  *합스부르크의 쉰부룬 궁전과 대정원

 

오스트리아 최대의 쉰부룬 궁전과 대정원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이었다. 궁전 앞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징인 독수리가 두 마리가 웅장하게 비웅하고 있다.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 따 만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1세)는 아내를 위하여 여름 별장을 만들었다.

 

글로리에테 언덕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쉰부른 궁전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베르사유 궁은 주궁이 높은 곳에 있으나, 쉰부른 궁전은 주궁이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궁정의 외관은 마리아 테레지안 옐로라고 불리는 황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궁전엔 1441개의 방이 화려한 이름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그 중 39개 방이 일반 공개되었다. 각기 방마다 왕가의 전통과 문화, 인척관계. 사교활동, 외교 활동이 의미를 갖고 있었다.

 

특히 ‘거울의 방’은 모차르트가 6세 때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연주를 하였고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을 했다는 것이다. 이방은1815년의 빈 회의 때 화려한 무도회가 펼쳐진 홀이었다. 나폴레옹 2세의‘회상의 방’에선 왕실 문화 전부 볼 수가 있었다.

 

궁전이 선 광대한 대정원은 프랑스 정원을 본따 만들었다. 정원 안엔 바로크 풍의 ‘아름다운 샘’‘로마 유적’ 등이 있고 ‘넵튠의 샘’ 뒤쪽 언덕에는 1775년에 세운 그리스풍 석조의 ‘글로리에테’가 있다. 정원 안에는 동물원과 열대식물원도 있다. 비엔나는 오스트리아 수도 합스부르크가의 궁전인 만큼 1760년대의 바로코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1441개의 방의 치장과 게시된 그림들이 당시의 상황을 정라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포세이돈 궁전의 바닥은 보리수 나무판으로 깔았다. 천상의 계단, 왕족과 서민, 궁전의 정원은 프랑스풍을 띠고 있었다.

 

이곳 궁 안에 결려있는 아델레 부루우 부인의 초상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최고작으로 불러졌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사생활이 모두 전시 된 궁전은 부와 권력의 치부를 보였다. 그녀는 16명의 자녀를 낳아 주변 왕국과 정략적인 결혼으로 유럽을 합스부르크 가의 제국을 만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들 방에서 크게 보이는 것은 1814년 아들 죠세프 1세의 침묵의 방에 있는 종달새의 감금이 애처롭다. 그는 정신병 환자로 종달새를 감금해 놓고 자신의 생활을 고뇌했던 것이다.

 

세계적인 명화 구스타프 클림프의 키스(1920년). 멜라닌의 자아상, 사랑의 애교로 버림받지 않으려는 여자의 2중서, 애교, 몸부림 , 유혹, 애욕이 방안의 시선을 잡는다.

 

  *천재왕자의 별베르 궁전

 

올간은 오스트리아의 천재 왕자였다. 그는 키 작은 곱추였다. 그러나 그는 오스만 터키를 추방한 전략가이며 건축가, 화가, 음악가였다. 그는 키가 작아 (158센티) 군대에 못 갔으나 천재적인 대전략 계략가 였다. 그는 알프스의 만년설 물을 비엔나로 끌고 와서 수돗물로 이용한 건축가였다.

 

그는 벨베르 궁전을 설계 하였다. 그는 모차르트 마르샤 테레사등과 교류하며 비엔나를 예술의 천국으로 만든 위인이다. 스웨덴 거리를 비엔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만들었다.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다.

오스트리아 여행을 마치고 프라하로 들어간다.

 

  *보헤미아 체코의 역사

 

5~7세기에 슬라브족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에 정착했고 슬로바크 슬라브족은 슬로바키아 지역에 정착 하였다. 이 두 종족은 A.D. 833년에 연방 모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그 세력은 보헤미아에서 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 서부, 폴란드에 이르렀다.

 

A.D.906년 헝가리의 마자르족이 모라비아 왕국이 슬로바키아를 점령한 이후, 슬로바키아 지역은 1000여 년 동안 체코와 분리된 채로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다. 체코인들은 모라비아 제국이 쇠락하기 시작한 9세기 말(895) 즈음 프라하를 중심으로 보헤미아·모라비아·루테니아·슐레지엔을 포함하여 독자적인 국가인 보헤미아 왕국을 세웠다.

 

1158년 체코 왕은 신성로마 황제로부터 왕조 세습을 승인받고, 1204년에는 왕국의 독립도 인정받았다. 보헤미아 왕국은 프르셰미슬 오타카르 2세 치하에서 번성하여 당시 영토가 오데르강에서 아드리아 해 까지 확대되었다.

 

제2대 왕 카를 4세는 뛰어난 통치능력으로 1346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됨과 함께 프라하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에 만들었다. 당시의 체코(보헤미아)는 정치적·문화적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15세기 중엽, 비잔틴제국을 섬멸한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헝가리 동쪽 지역까지 진출하게 되자 1526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1세가 체코와 헝가리 국왕을 겸임하게 되었다.

 

체코의 전 영토가 1918년까지 300여 년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1916년 민족지도자 마사리크(Masaryk)와 그 제자인 베네시는 파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같은 해 10월 28일 독립을 선포하고 공화국이 되었다. 1938년에는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가 체결한 ‘뮌헨 협정’에 의거하여 독일에 영토가 할양되고 폴란드와 헝가리 땅도 빼앗겨 체코슬로바키아의 면적과 인구는 1/3로 줄어들었다.

 

1939년에 나치스군의 침공을 받은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의 통치를 받게 되자 1940년 베네시 대통령은 런던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43년에는 소련과의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고 프라하가 구소련 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베네시는 독일의 체코군단이 소련 편에 들어 독일을 침공하다가 어디에도 설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콜차크의 황금을 강탈하여 체코 군 67,000명을 무사히 시베리아 철도를 통하여 블라디보스톡로 이동하여 조국으로 이주시키는데 성공한 장군이었다.

 

1956년 소련에서 벌어진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인 노보트니 정권이 지속되었다. 프라하의 봄은 자치권을 제한받던 슬로바키아 민족의 감정이 악화되었는데 1968년 1월 총회를 통해 노보트니는 사임하고 개혁파인 두프체크가 당 제1서기를 맡았다.

 

개혁파들은 4월에 열린 총회에서 재판의 독립, 의회제도의 확립, 사전검열제의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보장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정부가 이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개혁을 통해 자유를 부르짖는 '프라하의 봄' 운동이 펼쳐졌다.

 

소련은 체코 사태가 동유럽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하여 1968년 8월 20일 체코슬로바키아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나고 1969년 4월 후사크가 당 제1서기가 되는 사회주의 국가가 태동하였다.

 

  (13) 백탑의 도시 프라하

 

비엔나에서 4시간 30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체코의 수도 프라하로 가다. 푸라하는 백탑의 도시라고 한다. 뾰족한 바로크 식 탑이 100개 이상 높이 솟아 있어서 백탑이라고 한다. 동유럽의 파리, 연인들의 도시, 동유럽의 보석이라 부르는 프라하는 프라하 성에서 으 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흐라트 챠니 광장, 화약탑, 구시가지 풍경, 옛 시청 청사에서 중세의 고도를 경험할 수 있다.

 

  *.천년건축 프라하성

 

프라하 성은 동서를 관통하는 블타바 강 언덕에 세워진 고도의 성각도시다. 비투스 체코대성당은 스테인 그라스를 세공한 창을 갖고 있다. 성당 건축 양식에서 마치 연금술사들의 투혼을 상상할 수 있었다. 성당은 고딕식과 르네상스식, 바로크식, 로코코식, 네오 르네상스식 건축술로 700년 동안 지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건축술이 달라 부분마다 건물의 모양이 다르다. 체코 대성당은 체코 왕들의 무덤이라서 습도가 높으며 냄새가 지독하다. 그리고 이 성당은 황제와 교황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 고백의 성상 카를교(Charles Bridge)

 

카를교는 블타바 강위에 세워진 가장 유서 깊은 다리로 구 시가지와 신시가지 말라스트라나를 이어주는 다리로 양끝에 거대한 고딕 양식의 교탑이 서 있다. 이곳은 망루이며 전망대이다. 체코 최초로 돌(석조)로 만든 다리다. 보행자 전용 다리로 프라하 성, 천문 시계와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관광의 중심이다.

 

전체 길이는 약 520m, 폭은 약 10m이며 30개의 성상들이 좌우 난간에 각각 마주보며 서 있다. 카를교 위의 성상들은 원본도 있지만 복제품이 마치 원본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원본은 국립 박물관과 비셰그라드 포대에 보관 중이다.

 

카를 교에서 고백의 성상을 본다. 젊은 왕비가 이 다리 수문장과 바람을 피운다. 그 사실을 사제에게 고백한 것을 황제가 알고 그 사제를 불러 왕비가 고백한 비밀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나 사제는 말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를 강물이 던져 버렸다. 훗날 사제들은 사제의 본분을 다한 그를 다리위에 성상으로 세웠다.

 

카를교 위에는 초상화와 캐리 컬처를 그리는 화가들,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 거리의 음악가들이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 준다. 또한 얀 네포무츠키 성상 앞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얀 네포무츠키 성상 앞엔 관광객들이 붐빈다.

 

다리를 건너가면 비틀즈 멤버였던 존 레논을 초모하는 벽이 있는데 관광객들의 낙서를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 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오픈 벤즈 카를 타고 시내를 도는 거리 투어가 한층 재미를 더 해준다.

 

10세기 경에 나무로 만든 다리가 12세기 프라하의 대홍수로 블타바 강물이 넘쳐 다리가 쓸려나갔다. 12세기 중반에 다시 돌로 만들어진 유디트교는 독일에 이어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돌다리다. 200년 후인 1342년 겨울에 생긴 얼음 덩어리로 인해 다리가 무너졌다.

 

이후 1357년 카를 4세가 프라하 성에 비트 대성당을 건축했던 건축가에게 이 다리의 건축을 맡겼다. 그는 겨울에 얼음 피해를 보지 않도록 다리 밑을 거대한 교각으로 받치고 달걀 노른자를 돌과 돌 사이를 접착시키는 공법으로 매우 강하고 튼튼한 다리를 1407년에 완성하였다.

 

  *화약탑

 

까를교 주변의 명승지로 화약탑을 빼놓을 수 없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 하는 13개 출입문 중 하나 1700년 합스부르크의 왕궁의 화약 창고였던 출입문 건물이 예술성을 나타내는 건물로 남아있다.

 

  *까를대학

 

1348년에 세워진 유럽 최초의 신학대학이다. 아이슈타인도 이 학교에서 근무했고 소설 변신(變身-1916년 간행)을 쓴 소설가 카프가가 이 대학을 졸업 하였다. 그는 유대계의 독일인 작가로 운명의 부조리, 인간 존재의 불안을 통찰하여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하여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는다.

 

 * 에스타트 극장

 

에스트라 극장은 체코의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1787년 오페라 ‘돈 지오반니’로 모짤트가 초연하였다. 1984년 밀라노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의 배경이기도 하다. 바출라프 광장은 바출라프 장군이 기마상과 불패의 명장 지슈카 장군 (1360년 ~ 1424년)의 동상이 서 있다.

 

바출라프 광장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의 민주화를 꽃피운 광장, 1969년 소련군이 침공하자 민주화의 기수 얀 팔라크가 분신한 광장이다. 자유의 광장 이라한다. 프라하의 천문시계는 1410년에 프라하 대학의 수학교수 였던 하뉴슈가 만들었다.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시계에 대한 소문이 유럽 각국에 퍼지면서 다른 나라에도 주문이 쇄도하였다. 그러자 시계를 독점하고 싶은 프라하에서 하뉴슈가 시계를 만들지 못하게 그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한다. 화가 난 하뉴슈는 시계탑에 올라가서 시계를 정지시켜 버렸다. 시계바늘은 그때부터 400년 동안 멈추었다. 그 후 1860년 수리를 하였다.

 

  *체코의 건국신화 비셰그라드(Vyšehrad)

 

체코의 건국 신화가 시작된 곳이다. 스마트라의 교향곡‘ 나의 조국’이 작곡된 으로 전설 속 리부셰 공주가 평범한 농사꾼인 프르제미슬에게 마법의 말을 보낸 장소다. 그 말이 초면부지의 남자를 그녀 앞에 서게 하였다.

 

후에 두 사람은 결혼해서 프라하의 시조인 프르제미슬리트 왕조를 창시한다. 리부셰 공주는 숲이 우거진 비셰흐라드에서 블타바 강을 바라보며 영광이 하늘에까지 미칠 위대한 도시의 탄생을 기원 했단다. 그 위대한 도시가 탄생했고 그곳이 바로 프라하다. 바울성당이 있는 스마타나는 작가. 화가, 음악가등 예술가들의 공동묘지다.

 

  * 페트르진 언덕

 

프라하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라하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말라스트라나 뒤에 위치한 거대한 구릉지인 페트르진 언덕과 1891년 프라하 박람회 때 에펠탑을 본떠 만든 페트르진 탑에 올라가면 아름다운 프라하의 전경을 멀리까지 굽어볼 수 있었다. 프라하가 옛 정경을 그대로 간직한 이유는 전쟁의 포격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프라하의 봄 바출라프 광장

 

카를 4세의 동상과 1967년 프라하의 봄을 이끈 학생들의 민주화 동상이 있다. 그들은 소련의 전차에 짓밟혀 죽었다.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광장에 나서서 시장에게 엄포를 놓았다.‘프라하를 파괴할래. 내말을 들을래’ 라고 묻자 시장은 문화재를 보호하겠다는 생각에 ‘폭격을 말아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총 한방 쏘지 않고 체코를 장악하였다. 그 대가는 옛 고전의 건물을 지금까지 보전 할 수 있었다.

 

발칸에서 다민족 국가의 분노와 눈물을 알았고 동부 유럽에선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예술의 진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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