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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논단]“南冥學의 발원지” 합천

합천 벽한정(碧寒亭)과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

기사입력 2018-12-10 오전 9:35:3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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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논단]“南冥學의 발원지” 합천 벽한정(碧寒亭)과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
김무만 경영학박사



. 시작하며

 

한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출처가 은일(隱逸)” 그 자체였던 조선시대 대표적 산림처사(山林處士)중의 한분인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은 합천이 자랑하는 대학자이다.

 

 1501년 같은 해에 퇴계 이황은 지금의 경북 안동에서, 남명 조식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퇴계는 153434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고, 남명은 153939세에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遺逸)”로 인정 받아 임금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학우등사(學優登仕)가 상식이었던 시대에 퇴계는 사대부의 길을 걸었고 남명은 그것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했다.

 

남명은 조선 제13대 왕인 명종(明宗)이 수차례 벼슬을 내리고, 퇴계 이황도 벼슬길에 나오기를 편지로 간청했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 끝내 1555년 단성현(지금의 경남 산청) 현감직 마저 거절하고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라는 상소문을 올려 조정의 부패와 무능을 질타하는 한편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논리를 제기하여 조정을 놀라게 했다.

 

또한 백성의 존재가 무섭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등 목숨을 건 우국애민(憂國愛民)을 위한 실천궁행(實踐躬行)의 행동을 보였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제자와 문인(門人)들에게 전수되어 임진왜란 당시 의병창의(義兵倡義)의 도화선이 되기도 헸다.

 

남명의 학맥(學脈)은 인조반정과 이인좌의 난 이후 정치적 등이 이유로 거의 소멸해 가고 있었다. 다행히 1986년 남명학연구원, 1990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남명 정신의 선양사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는 합천출신 전두환 대통령의 재임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지난 20153월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경북도청 회의실에서 “ 500년만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며 남명퇴계 사상 교류촉진 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제 남명학은 합천과 경남을 뛰어 넘어 전국은 물론 세계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남명 정신은 바른 마음바른 언행이다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이 따르고 실천해야 할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에 남명학 연구의 근간이 되는 남명의 연원록인 <산해사우연원록>을 편찬한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과 이것을 편찬한 장소인 경남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에 위치한 벽한정(碧寒亭)은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약하고 존현(尊賢)” 사업에서 소외되고 있다. 본 논고(論告)는 합천 벽한정이 남명학의 발원지로 지정되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南冥의 사숙제자인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의 행적과 벽한정(碧寒亭)의 발전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 南冥의 사숙제자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의 행적

 

무민당 박인은 1583(선조 16) 합천군 야로현 우계촌 외가에서 테어났다. 내암 정인홍이 외종숙이다. 조부는 충노(忠老)이며 조모는 광산김씨 림()의 딸이다. 아버지는 수종(壽宗)이고 어머니는 서산정씨이다. 그리고 박인 4대조 순신(舜臣)의 맏형 우()의 사위가 동계 정온(鄭蘊)6대조 정전준(鄭悛俊)이다.

 

박인의 사위는 의성인(義城人) 김극형(덕탄 김두남의 아들)이다. 1628년 남명의 아들 조차마(曺次磨)로부터 연원록과 연보의 찬술을 부탁받고 9년동안 노력 끝에 산해사우연원록 편찬을 완료했다.164058세로 학포 정훤(鄭暄)의 서재인 진양군 고산정사(孤山精舍)에서 별세했다. 무민당은 정훤의 두아들 스승이다.

 

박인은 벼슬은 하지 않고 평생 처사(處士)로 살았지만 당시 걸출한 인물들인 정온, 유진, 조임도, 임진부, 강대수, 이지분, 하홍도 등과 가깝게 교류했다.

 

 

1.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錄)” 등의 편찬

 

남명 사후 가장 활발하게 남명학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 무민당 박인이다. 박인이 남명학파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은 오직 자신의 학문적 소양과 사우(師友)와의 인간관계가 원만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남명의 <연보><언행록>을 찬()하고 남명의 연원록인 <산해사우연원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인은 1628년 남명의 3자인 조차마의 촉탁을 받고 하홍도, 임진부, 조임도와 함께 <山海師友淵源錄>편찬하였다. 편찬하는 과정인 1634에는 동계 정온에게 편지하여 협조를 요청한 바 있고 1635년에는 정온이 편찬장소인 벽한정(碧寒亭.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소재)을 방문하여 직접 교열(校閱)을 하고 9년간의 긴 작업을 통해 1636년에 편찬을 완료했다.

 

<山海師友淵源錄>은 남명에 관한 최초의 사우록으로 후에 함양의 남계서원에서 편찬한 <덕천사우연원록>의 모체가 되었다. <山海師友淵源錄>의 편찬은 경상우도의 남명학파를 결집하려는 자체적 노력이었으며, 박인이 이 연원록의 편찬을 총괄했다는 것은 경상우도의 여러 학자들로부터 신망도가 높고 남명학의 적통(嫡統) 계승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山海師友淵源錄><남명언행록>, <남명연보>를 박인이 편찬을 주도한 것은 당시 경상우도에 정온, 조임도, 하홍도 등 쟁쟁한 인사들이 생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중요한 사업을 박인에게 맡긴 것을 보면 박인의 학문적 자질과 남명의 학문과 처사적 삶을 철저하게 사숙(私淑)한 처사(處士)로 인정한 것으로 여겨 진다.

 

박인이 과거를 단념하고 남명을 철저하게 사숙하게 된 단초(端初)는 남명이 1549년 거창 감악산을 오르면서 지었다는 칠언절구 욕천(浴川)”에 나오는 혹시라도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당장 배를 쪼개어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리라는 시구(詩句)를 읽고 척연감오(惕然感悟) 했다고 알려져 있다.

 

浴川(욕천) : 냇물에 몸씻기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 온몸에 쌓인 사십년 동안 허물은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 천석 맑은 못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 혹시라도 티끌이 오장에 생겨 있다면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 지금 바로 배를 갈라 저 물에 띄워 보내리

 

 

2. 향촌에서의 향약과 교육활동

 

박인은 162441세에 조동정사(釣洞精舍), 1629년 벽연재, 1633년에 용연재, 1639년에 벽한정(碧寒亭)을 각각 건립하여 강학의 장소로 삼고 향촌에서 향약과 교육활동을 전개했다. 용연재(龍淵齋)는 조동의 고사정 뒤에 있다가 후에 벽한정으로 1662년 이건했다. 박인은 용연재와 벽한정에서 학업과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용연재는 인근 삼리(三里)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3등급으로 나누어 농번기를 제외한 봄, 가을에 집중적으로 교육을 하던 곳이다.

 

용연서원은 박인 사후(死後) 22년 뒤인 1662(효종 3)에 건립되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흔적이 없다. 용연서원 건립을 주도한 사람은 박인의 문인들로 홍기범, 심일삼, 송필원 등이다. 1692(숙종 17)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건립자인 합천 율곡 출생 주세붕 선생의 족현손인 주채(周采. 1661-1690)를 소두(疏頭)로 하여 용연서원 사액(賜額)을 위해 연명으로 상소를 한 일이 있다. 이 상소에 참여한 사람은 초계, 삼가, 단성, 고령, 현풍, 창녕, 거창, 의령 등의 영남생원 800여명 이었다. 하지만 정인홍 사후 합천지역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받아주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박인은 퇴계, 율곡 등 선현들이 만든 향약의 뜻을 이어 받고 각 향약의 내용을 철충해서 <삼리향약>.을 만들었다. 삼리향약은 洞約이나 面約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 향약의 서문(序文)서호일면(西湖一面)” 이라고 나오는데 이곳은 지금의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1,2구 성산리 1구 마을 일원으로 여겨 진다. 이 서문은 박인의 아들 박만(朴曼.박원 용주면노인회장 선조)이 쓴 것이다.

 

박인이 만든 삼리향약은 8개의 조목으로 덕업으로 서로 권하고, 혼인에 서로 부조하고, 환란에 서로 규휼하고, 死喪에 서로 구원하고, 松木을 금양하고, 過惡을 형벌하고, 사업을 분담하고, 春秋로 글을 강습하며 상중하 3등급으로 구분하여 행하는 것이다. 이 향약은 대부분의 향약이 사족(士族)에 의한 백성들의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한 체제인 것과 달리 사족과 백성이 더불어 실천헤 나가는 방향을 제시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박인의 <삼리향약>은 다른 지방의 향약에서 볼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고, 합천지방의 향토에 적절한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헤 놓고 있기 때문에 수암 유진이 <서원향약>에는 없는 내용이 실려 있다며 등사해 갔다고 한다.

 

박인이 건립한 벽한정(碧寒亭)에는 경재(敬齋)와 의재(義齋)라는 현판이 있는데 박인이 직접 각인한 것으로, 여기서 우리는 박인이 남명의 사상을 자신을 경계하는 글로 삼고 깊이 체득해 나가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3. 박인(朴絪)의 연보 개요

 

박인은 1583년 합천 야로현 우계촌 외가에서 출생하여 7세가 되던 1589년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헸다. 27살인 1609년에 향시에 합격했으나 앞으로 과거를 포기한다는 자신의 의지를 부친께 시를 지어 상달하고 스스로 호를 임헌(臨軒)이라 했다. 박인이 부친 박수종에게 올린 <上廢擧業書>라는 칠언절구를 소개한다. 현재 벽한정 기둥에 새겨져 있다.

 

호월미풍제경천(皓月微風霽景天) 닭밝고 바람불어 비갠 경치 맑았으니

천심징숙귀신경(天心澄肅鬼神驚) 하늘이 맑고 엄숙하니 귀신도 놀라도다

번사이십년전사(翻思二十年前事) 이십년 전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만축괴황오차생(謾逐槐黃誤此生) 부질없이 벼슬 쫓아 인생을 그르쳤네

 

161230세에 덕천서원에 가서 남명을 배알하고 두류산을 유람했다. 1613년부터 1614년까지는 내암 정인홍에게 3회에 걸쳐 당시 북인이 강행하던 폐모(廢母)의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언사(言事)로 피소(被訴)된 한사 강대수에게 편지하여 위유(慰諭)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는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으며, 그해 학포(學圃) 정훤의 고산정사에서 겸재(謙齋) 하홍도를 만났다.

 

1624(인조2) 42세에는 경북 칠곡의 광주이씨 석담 이윤우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었으며, 간송(澗松) 조임도가 방문했다. 그리고 162745세에는 경북 상주의 진양정씨 우복 정경세에 의해 학행(學行)”으로 천거되기도 했다.162846세 때 남명의 3자 조차마로부터 연원록과 연보의 찬술을 부탁받았다.

 

163149세 때 서애 유성룡의 3자 수암(修巖) 유진(柳袗. 1582-1635)이 합천군수로 부임하여 인사차 조동정사를 방문했다. 이때부터 유진과 박인은 수차례 만나고 편지를 주고 받는 등 교우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이후 유진이 박인을 서호처사(西湖處士)”로 지칭하게 되면서 박인이 사림에서 처사로 지칭되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서호처사(西湖處士)”라는 구절이 나오는 유진의 아래 는 지금도 벽한정에 편액되어 있다. “서호(西湖)”는 당시 관아가 있는 군청 소재지에서 보면 서쪽에 박인이 살고 있다는 뜻이며, 지금은 조동(釣洞)앞이 대부분 논이지만 당시는 큰 늪(호수)였다.

 

來訪西湖處士居(래방서호처사거) : 서호처사 사는 곳을 방문하니

林泉長物只圖書(임천장물지도서) : 산중의 남은 것은 책뿐이더라

世間榮利何須道(세간영리하수도) : 세간의 영리는 무엇을 말하랴

一點浮雲過太虛(일점부운과태허) : 한점 뜬구름만 하늘에 떠가네

 

1634년에는 연원록 편찬과 관련하여 동계 정온에게 편지하여 협조를 요청했으며, 1635년에는 정온이 벽한정(당시는 용연재)을 방문했고 박인은 회연서원으로 가서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를 배알했다.

 

1636년 산해사우연원록 편찬을 완료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창의하여 아우 박위(朴緯)의 의병 진지에 참가했다. 1647년 인조가 강화(講和)하지 당호를 무민당(无悶堂)으로 개칭했다. 이듬해 1638년에는 아들 만()과 함께 거창 모리재(某里齋)로 동계를 찾아 갔다. 1639년 벽한정을 준공하고 16405810월 학포 정훤의 서재 고산정사에서 별세했다.12월에 장사(葬事)를 지냈다. 1641년 조임도, 임진부에 의해 행장(行狀)이 찬()되었으며, 1662년 문인(門人)인 홍기범, 심일삼, 송필원 등에 의해 용연서원이 건립되었다. 1692년 용연서원에 대한 청액상소를 주채 등 영남생원 800여명이 하였으나 사액(賜額)을 받지 못했다.

 

. 벽한정(碧寒亭)의 현황과 발전 방향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일명 이사리)에 소재한 벽한정(碧寒亭)”1996311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33호로 지정되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사숙제자(私淑弟子)인 고령인 무민당((无悶堂) 박인(15831640)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성리학을 연구하던 유학자들과 후학양성을 위해  1639년 건립한 것이다. 이 벽한정 뒷편에는 1914년 일제시대부터 용연사(龍淵祠)라는 사당을 건립하여 박인(朴絪)과 부친 박수종(朴壽宗), 아우 박위(朴緯) 3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33일과 99일 춘추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이곳은 남명의 아들 조차마의 부탁을 받아 박인이 남명의 연원록(淵源錄)<산해사우연원록> <言行錄><年譜>를 하홍도, 조임도, 임진부 등과 협조하여 세밀하게 검토하고 철저하게 고증한 뒤 정온의 교열를 거쳐 편찬을 완수한 곳이다. 남명 사후(死後) 60년만에 남명과 관련된 문헌의 1차적 종합정리 작업이 진행된 곳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표지석도 없고 주차장, 편의시설 등이 부족하여 뜻있는 사람들은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관계기관 등의 관심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박인의 학문적 능력이나 지역의 지도자, 교육자로서의 업적을 살피고 연구하여 후세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학술대회를 비롯하여 벽한정 주변의 정화작업을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체험학습과 관광자원으로의 활용이 필요하다고 본다

 

. 마치며

 

왜 합천 벽한정(碧寒亭)이 남명학(南冥學)의 발원지인가남명과 남명학을 연구하고 선양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남명정신의 적통 계승자이며 명실공히 남명학을 최초로 정립한 박인(朴絪) 선생의 공적은 여태껏 묻혀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박인 선생의 행적을 연구하고 선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처사적(處士的) 사상과 행동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역 지식인들의 인문학적 책임이라고 본다.

 

합천 벽한정((碧寒亭)이 남명학의 발원지인 까닭은 남명이 사망한지 56년후 박인이 46세 되던 1628년에 남명의 셋째 아들 조차마(曺次磨)가 남명 선생의 연보와 사우록의 편찬을 박인 선생께 부탁했다. 그 당시 영남지역에는 쟁쟁한 학자들이 생존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인에게 그 책무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박인이 남명학파 적통 계승자로서의 위상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본다.

 

박인이 편찬한 문헌들이 현재의 남명학을 연구하는 토대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종합적으로 집필한 사람이 박인이며, 그가 집필.편찬한 장소가 벽연재(壁淵齋), 용연재(龍淵齋 : 용연서원의 전신)이기 때문에 지금 남아있는 이곳 벽한정이 남명학의 발원지가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중용(中庸)에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9(9)중에 첫째는 수신이며, 둘째는 존현(尊賢)” 이라는 말이 있다. 존현은 현인(賢人) 즉 덕망있고 휼륭한 인물을 존경하라는 말이다. 정치를 할 때 존현을 중요시 해야 하는 것은 현인들의 바른 사상과 행동을 본받아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덕망있고 휼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도록 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인(朴絪) 선생은 우리 합천이 배출한 현인(賢人)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묻혀져 있던 남명학의 최초 정립자인 선생의 업적을 연구하고 선양하는 일은 남명선생과 남명학의 선양사업과 동등하게 이루어 져야 한다고 본다.

 

박인 선생은 학문적 능력이나 사우문인(師友門人)을 살펴보면 사회지명도가 대단한 인물임에도 그 동안 사학적(史學的)으로는 물론이고 교육학적 연구가 미흡한 실정이다. 소멸되어 가던 남명학파를 재결집하려던 노력과 향촌사회에서 보여준 모범적인 지식인의 삶과 교육활동을 후세들이 본 받기 위해 유관기관과 향토사학자들의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남명학의 발원지인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일명 이사리)의 옛 용연서원의 복원 사업을 비롯하여 지금의 벽한정을 정화하는 등 박인 선생에 대한 존현사업을 하루 속히 시행하여 지역의 인문학적 체험공간으로 활용하는 한편 관광자원화하는 등의 조치가 조속히 이루어 지기를 희망한다. 앞으로 박인 선생에 대한 깊은 연구와 다양한 선양사업을 유관기관단체와 문중(門中) 물론 지역사회와 함께 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1. 池柾香, “17世紀初 南冥學派處士的 性向敎育活動(无悶堂 朴絪中心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석사학위논문, 1997.

2. 朴 絪(1583-1640), <无悶堂集>, 碧寒亭, 1982.

3. 설석규 자음, <남명학과 정치철학 연구>, 남명학연구원출판부, 2001

4. 성백효 편역, “<대학. 중용 집주>, 한국법령정보주식회사, 2009.

5. 조회환 지음, <유학자 조식의 수양방법과 이상정치론>, 비움과 채움, 2014.

6. 정옥자 지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선비>, 현암사, 2012.

 

합천인터넷뉴스(hcinew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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