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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관아 바로알기

"김제 관아는 김제 향교와 함께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공간"

기사입력 2020-09-20 오후 5:09:5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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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관아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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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김제 관아 내삼문 모습
김제 관아 앞 시가지 전경(일제강점기 초)
일제 강점기 옛 김제관아 모습
김제 관아와 향교 전경
김제 내아
김제 관아 내 피금각
학예연구사 백덕규

김제 시민들 모두가 알고 있을 법한 김제 관아는 김제 향교와 함께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공간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부분은 조선팔도 어느 지역에나 있었던 관아와 향교가 왜 김제에는 국가 사적이 되었는가이다.

그 이유는 여러 지자체의 경우를 보더라도 관아와 향교가 있는 곳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조금 더 살펴보자면 향교는 남아있되 관아가 소실되었고, 관아가 남아 있지만 향교가 소실된 경우가 대다수이며, 이마저도 근래에 복원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제 관아와 향교는 인접한 거리에 함께 보존되고 있어서 조선시대의 행정기관과 교육기관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아라는 것은 사실 지방의 해정 기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원(官員)들이 모여 나랏일을 다스리기 위해 지어진 일련의 건물, 즉 궁궐내의 중앙행정을 집행하는 중앙관아와 지방에서 각 도()에 관찰사가 집무하던 감영(監營)과 그에 따른 부속시설, 수령(守令)이 집무하는 동헌(東軒)과 그에 따른 부속시설을 통칭하는 말로서, 지금으로 말하면, 도청, 시청 등 지방 관청뿐 아니라 문화재청 등 중앙부처까지 아울러서 관아에 속한다는 뜻이다.

 

기록을 살펴보자면 관아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삼국시대부터로 추정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구성체계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전주 객사와 같이 객사(客舍)’라는 건물은 삼국시대 이래 각 지방마다 있었던 것으로 지방관아의 인근에 설치되었다. 이곳에서는 정청(正廳)에 중국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향궐망배(向闕望拜)하는 의식을 가지면서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다. 또한 공무적인 출장을 내려온 사신(使臣)등이 머물 수 있도록 정청 양쪽에 붙어있는 동익헌과 서익헌에 머무르게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의 중앙관아의 경우 현재의 중앙부처의 개념이기에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한 기관들이 있었다. 삼정승을 중심으로 한 통치기관인 의정부가 있었고, 그 감독 하에 이()()()()()()의 육조가 편제되었다. 또한 국왕 직속의 비서기관인 승정원, 의금부, 삼사(三司), 사관(四館), 그리고 중앙의 제반 사무를 관장하는 한성부가 있었다. 또한 특수 경관직으로 종친부, 충훈부, 의빈부, 돈녕부 등이 있었다.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던 형조, 의금부, 한성부를 묶어 삼법사(三法司)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며,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규장각 등 일부 관아는 공간적으로 궁궐 내에 귀속되어 궐내사(闕內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왕실의 각종 사무를 처리하였다.

 

그렇다면 전라감영이나, 김제관아와 같은 지방관아는 어떠한 기능을 하였을까? 이는 관찰사(觀察使)와 수령(守令)에게 주어진 임무(任務)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도지사급에 해당되는 관찰사는 방백(方伯)이라 하여 한 도()의 행정사법군사권을 통할하고 부윤 혹은 부사, 목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의 수령을 통할하고 감시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에 김제관아 등의 수령의 임무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경국대전(經國大典)󰡕수령칠사(守令七事)를 살펴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첫째로 농상성(農桑盛)의 임무로 농사일과 누에치기를 부흥시켜야할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당시 미곡과 옷감 등이 상품화폐로서의 기능하였기에 지방재정의 근간이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호구증(戶口增)의 임무로 인구를 늘려야 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대의 경우 인구가 있어야 농사를 짓게 되어 경제를 부흥시키고, 고을과 국가를 방어할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인구에 대한 세금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학교흥(學校興)의 임무로, 김제관아의 경우 김제향교의 활성화를 통하여 지역민들의 유교를 바탕으로 한 교화를 통하여, 충과 효의 관념을 심어 체계적인 국가사회체계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넷째로 군정수(軍政修)로 군사관계의 정사를 잘 다스리는 것을 바탕으로 지역방어와 국가방어의 체계를 갖추기 위함이다.

 

다섯 번째로 부역균(賦役均)으로 공공의 건설행정 등에 지역민들을 동원할 때에는 균등하고 공평하게 일처리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로 사송간(詞訟簡)으로 민사나 형사, 분쟁 등이 있을 경우 업무처리를 간소하게 하여 백성들의 불편을 최소한으로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곱 번째로 간활식(奸猾息)으로 아전들의 농간질을 없애 투명한 지방행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령의 7가지 임무는 현재의 지자체장에게도 적용되는 덕목으로서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것은 관찰사가 수령의 치적(治積) 및 현부(賢否)를 평가하는 기준점일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가 관찰사와 수령의 기능을 십분 발휘하도록 최선을 다함으로써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방관아 수령의 기능으로 중요한 것은 조()()공물(貢物)의 수취였으며, 이러한 경제적 기능 외에 그들은 병졸(兵卒) 지휘, 기민진휼(饑民賑恤) 및 지방민을 교화하는 등 사회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현재 김제 관아를 보면, 가장 크고 중앙에 세워져 있는 건물이 동헌이라는 건물이며, 이 건물은 주로 수령의 집무실인 동시에 일반적인 행정업무와 재판이 행해지던 곳이다. 동헌이라 불리는 까닭은 동쪽에 있는 행정청이라는 의미에서 동헌이라 일반적으로 불리었던 것에서 비롯되며, 수령이 파견되어 정무를 보던 청사로서 정당(正堂) 혹은 정청(正廳)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동헌의 뒤편에 있는 아담한 자형 건물은 내아(內衙)’라 불리는 곳인데, 내동헌이라 하여 목민관이 살림을 하기 위한 살림채라 할 수 있다.

 

동헌은 다른 건물과 달리 독자적인 당호(堂號)를 사용하는데, 김제 동헌은 1667(현종 8) 김제군수 민도(閔燾)가 처음 세우고 이를 백성과 더 가깝게 지방통치를 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근민헌(近民軒)’이라 칭하였으며, 1699(숙종 25)에 중수하여 명칭을 수령 7시를 성실하게 이행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사칠헌(事七軒)’으로 고쳤다.

 

1881(고종 18)에는 다시 중건되었는데, 이후 김제동헌 건물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기에 비교적 온전한 모습이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어졌으나, 김제관아 도로 건너편에는 향청이라는 지금의 시의회역할을 하였던 건물이 있었다. 이것은 조선 초기에 지방귀족의 유향소로서 지방풍속 단속과 향리를 규찰하는 향촌교화(鄕村敎化)를 위해 유향품관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지방의 향촌자율기구였으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수령을 보좌하여 지방통치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밖에 지방의 실무를 담당하는 아전들의 집무공간인 작청(作廳)이 있었으며, 죄인을 다루는 공간 형청(刑廳), 지방의 호구관리와 전결조사, 부세의 부과와 징수 등에 관한 일을 담당했던 군사(郡司)라는 건물도 있었다.

한편 최근에 김제 관아터에 복원된 건물인 사령청(使令廳)은 수령의 명을 전달하는 사령이 근무하는 곳으로 각 관청의 서리들이 있던 곳을 말한다. 따라서 수령의 지시사항, 반포사항, 처분사항 등의 각종 명령을 전달, 집행하는 사령들이 근무하던 장소로 활용된 공간이다.

 

김제 관아의 호적고(戶籍庫)는 지방민들의 호적을 보관하던 장소로 구체적인 건립연대는 불분명하며, <지방도(1872)>에 유일하게 등장한다. 이후 관련기록 및 자료는 전무한 실정이기에 그간 발굴조사결과 일제강점기이후 무분별한 개발행위로 인하여 호적고의 흔적대신 연못터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이에 당초 계획했던 김제시의 호적고 복원은 잠시 보류된 상태이다.

 

내삼문과 외삼문 역시 구체적인 건립연대는 불분명하며, <지방도(1872)>에 최초로 등장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서 내삼문은 솟을삼문에 행랑이 붙은 모습이고, 외삼문은 중층 문루형식에 징벽루(澄碧樓), 벽지아문(碧池衙門)이라 편액 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웅장한 외삼문의 규모를 통해 김제시가 차지했던 위상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외삼문의 복원을 검토하던 중 위치가 김제 관아 앞 도로일부를 차지하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내삼문만 복원한 상태이다.

 

객사는 현재 김제 보건소 자리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비변사인방안지도(1745~60)>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건립연대는 불분명하다. 다만 1918년 김제군지에서 객사의 이명(異名)이 벽성관(碧城館)이었으며, 이 당시까지 존재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필자가 김제조씨 문중 분들에게 들은 바로는 일제강점기 객사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그 자재를 김제조씨 문중측에서 매입해 재실 및 사당 등을 세우는데 사용하였다는 내용을 전해들은 바 있어 이에 대한 추가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서 서익헌이 멸실된 객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나, 1956년 김제군지에서는 현존하고 있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는바, 1918년까지는 객사가 존재한 것이 확실하며, 1956년 이전에 멸실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헌을 바라보면 왼편에 누정과 같은 건물 한 채가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피금각이다. 그동안의 학계 정설에 따르면 피금각은 숙종 25(1699)에 동헌을 중수하면서 함께 건립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계곡집(谿谷集)'에 실려 있는 피금각기(披襟閣記)를 살펴보면 그보다 이전에 건립되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피금각기(披襟閣記)의 내용을 보면 기암자(畸菴子) 정홍명(鄭弘溟)이 김제의 수령으로 나오게 되었고, 이 당시 관아의 뒤쪽 편에 피금정을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따르면 인조 11(1633)정홍명(鄭弘溟)을 통훈대부 김제군수(金堤郡守)로 삼았다.’ 라는 기록을 통해 피금각의 건립연대는 1633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피금각은, 송강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업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하여 잠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자, 외부 손님들을 맞이하며 차담을 나눌 수 있는 곳으로,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아, 고을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아울러 그곳에서 휴식할 때에는 책을 읽거나 바둑과 거문고를 타며 심신의 피로를 달래던 곳으로 사용하였다학예연구사 백덕규

 

 

(kimjenews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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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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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길해
    2020-10-14 오후 12:08:53
    김제관아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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