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자연을 향한 치열한 구도의 서정
지은경 시인의 제17시집 『여기, 그리고 지금』
시를 쓰는 일은 결국 시인 자신이 걸어온 생채기와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성업이다. 이근배 시인의 평처럼, 삶과 삶이 부딪혀 일어나는 내면의 풍경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살을 깎는 아픔과 치열한 연마의 과정이 필요하다. 1995년 첫 시집 『시인의 외출』을 시작으로 부단히 시의 길을 걸어온 지은경 시인이 제17시집 『여기, 그리고 지금』을 세상에 내놓았다. 총 7부, 69편의 주옥같은 시편들이 수록된 이번 시집은 시인이 평생 동안 쌓아 올린 사유의 깊이와 생명에 대한 경외를 오롯이 증명해 보인다.
지은경 시인의 시세계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삶과 맞서 솟아나는 불꽃의 승화’에 있다. 오늘날 범람하는 현대 시들이 이미지 조작에 치우친 나머지 의미 전달을 훼방하거나 산만한 분위기로 소모되는 것과 달리, 지은경의 시는 선명한 내면의 풍경을 독자의 가슴 깊이 각인시킨다.
이근배 시인이 지적했듯, 그는 매몰찬 살깎기와 연마를 거친 명쾌한 레토릭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표출한다. 특히 환상적인 풍경들이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놀라운 연출력은, 신인들이 흔히 저지르기 쉬운 표현의 낙맥상을 말끔히 떨쳐내며 시적 완결성을 극대화한다. 도대체 어디서 그토록 풍부한 인스피레이션을 얻어내어 이토록 묵직한 시로 형상화해 내는지, 그 저력 앞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지은경 시인의 문학적 지향점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은 천착으로 이어진다. 제12시집 『숲의 집 툭 읽기』에서 여실히 드러났듯, 그는 도시화와 물신화 속에서 숲과 자연을 외면하는 세태를 거부하고, 숲을 정신의 안식처이자 치유의 장소로 삼아왔다.
허형만 시인의 평대로, 시인은 산에서 만난 나무들을 자신의 방으로 옮겨 심는 기막힌 발상이나, 달빛 고운 밤 맨발로 숲을 거닐며 하늘과 별을 바라보는 친화적 삶을 통해 넉넉한 생명의식을 보여준다. 숲의 침묵을 오독할까 두려워하는 그 섬세한 겸허함은 자연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며, 녹색이 곧 안전지대이자 생명의 근원인 '흙'의 존재로 확장되는 깊은 사유를 선사한다.
이번 시집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삶을 향한 끊임없는 구도의 자세다. 시인은 "한때 내 정신과 육신은 폭주 기관차였다"고 회고하며, 희망을 움켜쥐고 절망을 밀어내며 걸어온 지난날을 돌아본다.
산을 오르면서도 산을 보지 못하고, 사람 속에서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목마름 속에서 세상을 보는 시력을 되찾기 위해 "햇빛을 바르고 달빛을 먹으며 고독을 견디었다"는 고백은 울림이 크다. 오늘도 북한산 기슭 찻집과 길 위에서 시를 쓰며 "해석은 보류"한 채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시인의 뒷모습은, 우리 시대 진정한 시인의 초상이 무엇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제17시집 『여기, 그리고 지금』은 지은경 시인이 반평생 동안 갈고닦은 시적 정화의 결정체다. 화려한 기교에 기대지 않고, 삶의 부딪힘 속에서 건져 올린 진솔한 언어들과 숲이 건네는 생명의 울림은 삭막한 현대인의 정서를 맑게 적신다. 투명한 삶의 불꽃을 피워내며 여전히 자신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와 깊은 사유의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강서뉴스 신낙형 기자(채아 할아버지의 손녀 육아 동시집 ‘채아의 365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