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흠(欽欽), 120년 전 얼어붙은 상소장을 펼지다'
[독자 기고] 화순 동면 우평마을 진등산 애환을 거닐며
다산 정약용은『흠흠신서(欽欽新書)』의 제목에『서경(書經)』의 한 구절, "삼가고 또 삼가라(欽哉欽哉)"는 말을 새겨 넣었다. 사람의 목숨이 걸린 판결 앞에서는 한 치의 소홀함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경계였다. 그러나 다산이 진정 두려워했던 것은 비단 살인 사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힘없는 백성의 억울함이 관청의 눈치와 문중의 위세 앞에서 소리 없이 삭아버리는 일, 그 소리 없는 침묵이야말로, '흠흠'의 마음으로 다스려야 할 세상의 이치가 아니었을까.
2026년 7월의 마지막 날, 대지가 통째로 끓어오르던 그 열대야 속에서 나는 철창촌(現, 우평마을) 어르신을 찾아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여름의 열기마저 일순간 얼려버리는 서늘한 사료 한 장과 마주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20년 전,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을사늑약의 비극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살을 에는 추위였을 1906년 1월 13일 금요일자《대한매일신보》원본이었다.
누렇게 바랜 활자의 숲을 한 자 한 자 헤쳐 나가던 내 눈길이, 지면 한쪽 구석 '고백(告白)' 두 글자 아래 박힌 '화순군 철장(鐵庄)'이라는 낱말에서 문득 멈춰 섰다. 매일 밤낮으로 이곳 주민들의 안녕을 살피는 내 관할구역, 바로 지금의 '우평(牛坪) 마을'의 옛 이름이었다. 1965년생인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이 고요한 땅이 민초들의 가장 뜨겁고 처절한 절규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에어컨 바람도 잠재우지 못하던 한낮의 열기를 단숨에 가라앉히며, 나를 깊은 역사적 사색과 관할 치안을 책임지는 자로서의 묵직한 소명 앞으로 이끌었다.
120년 전 한겨울의 기사는, 옛 철장 땅, 진등산 명당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치열한 묏자리 갈등의 현장으로 나를 단숨에 데려간다. 대전 진잠(진평)에 연고를 둔 양반가 이기만은 피를 토하듯 조정에 상소 겸 고백을 올렸는데, 그 첫 문장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남래인(南來人)이 이르기를, 화순 철장촌 부근에……." 로 시작된다. 남녘에서 전해 들은 참혹한 사연을 그대로 옮겨 적는 형식을 빌려, 그는 차마 자신의 목소리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었던 억울함을 세상에 고했다.
이기만의 고백서에 따르면, 이 자리는 대대로 명당으로 전해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이씨 문중의 산소였다. 그런데 능주의 한 아전이, 임금으로부터 사패 받은 이 이씨 선산에 몰래 대나무를 꽂아 표를 세운 뒤, 이씨 조상의 묘 바로 위 겨우 다섯 치(15cm) 거리에 자기 조상의 무덤을 덧붙여 장사 지내면서 두 가문 사이에 격렬한 분쟁이 일었다고 한다. 부친의 머리맡을 침범당했다 여긴 이기만은 통곡하며, 이 땅이 본디 임금이 내린 사패지(賜牌地)이자 옛 관아의 판결문(前牌)으로도 이미 인정받은 자리임을 근거로 내세워 능주목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곧 스스로 무덤을 파헤친 것을 두고 소송하니, 거짓 아닌 것이 없다(无非虛假)" 120년의 세월을 건너온 이 짧은 문장은, 지금 읽어도 등줄기가 서늘해질 만큼 절박하다. 그러나 법도에 따라 바로잡아 달라던 그 간곡한 청에도, 명당을 둘러싼 두 가문의 힘겨루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깊은 갈등의 골만 남겼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기만 한 사람이 남긴 고백서 속 주장일 뿐, 오늘날 그 문중이나 후손들의 뜻과는 무관한 아득한 옛 일임을 미리 밝혀둔다.
이 서글픈 비극을 낳은 뿌리 깊은 장묘문화는 이제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터 좋은 곳마다 '명당'이라는 이름으로 묘지가 들어앉아 있는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본래 매장문화는 지극히 유교적이고 차별적인 신분 제도의 잔재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초장(분)지에서 3년 상을 치렀던 본뜻은 오직 살을 썩혀 뼈만 남기기 위함이었고, 그 뼈를 추려 정갈하게 부도(탑)를 쌓아 추모하는 것이 본래의 법도였으나, 어느덧 매장문화가 기형적으로 굳어버렸다. 아마도 당시 화장 비용이 지나치게 컸던 구조적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시대의 흐름과 국토의 효율성에 맞게 장묘 문화도 근본적으로 혁신되어야 마땅하다. 120년 전 이 땅의 비극은, 결국 잘못된 장묘 집착이 낳은 시대적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 참담한 역사의 현장 앞에서 나는 가만히 자문해 본다.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힘의 논리가 곧 올바름이 되는가. 사패지라는 임금의 문서조차, 사법 정의와 관청의 판결마저 문중의 권세 앞에서 표류하던 그 시절의 모순 속에서, 약자들의 눈물과 호소는 정당한 권리를 되찾기까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했다.
신문의 지면 구성 또한 당대의 서글픈 시대상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전면 상단은 황제의 칙령과 관보의 무거운 활자로 가득했고, 그 아래로는 수입 담배(SPIDER)나 연유, 통조림 같은 서구식 상업 광고 삽화가 이질적으로 끼어들어 근대 전환기의 낯선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뒷면으로 넘어가면 여백 하나 없이 세로줄을 촘촘히 쪼개어 국내외 긴박한 정세를 빼곡히 눌러 담았는데, 이기만 한 사람의 사연조차 그 좁은 지면 한 귀퉁이에 겨우 몸을 뉘어야 했던 그 절박함에서, 일제의 삼엄한 검열 속에서도 정론을 지키려 했던 당시 언론의 결연함이 서늘하게 배어 나왔다.
숨 막히는 한여름의 가마솥더위가 내리쬐는 2026년 7월 말의 오늘과, 혹한의 차가운 눈물이 맺혔을 120년 전 1월의 날씨만큼이나, 신문 속 기자들의 정신과 오늘 우리 지역 사회의 현실은 극명한 온도 차를 보인다. 관청조차 힘 있는 자의 눈치를 보던 시절, "거짓 아닌 것이 없다"는 한 사내의 절규를 원문 그대로 실어 민초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고 정론을 펼쳤던 120년 전 언론의 뜨거운 숨결은, 오늘날 관공서에 신문을 강제로 밀어 넣고 대금을 뜯어내며 학연과 지연으로 협박을 일삼는 일부 지방지 기자들의 얼어붙은 양심과 극명히 대조되어 가슴을 씁쓸하게 한다. 시대와 제복은 바뀌었을지언정, 부조리한 세력 앞에서 서러운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지역의 공평함을 수호해야 한다는 치안과 언론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다.
뜨거운 한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오후, 나는 120년 전의 숨결이 서린 동면 우평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마을 한가운데 웅장한 기품을 자랑하는 신안 주씨 제각 '귀후재(歸厚齋)'가 장엄하게 서 있었고, 제각에는 조상의 장례를 정성껏 치르고 먼 조상을 추모하여 백성의 덕을 두터이 한다는 『논어』의 구절 '신종추원 민덕귀후(愼終追遠 民德歸厚)'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기둥마다 걸린 주련에는 "만 겹의 구름은 명산에 피어오르고, 꽃다운 자손들이 제사 예법을 경건히 받들며, 신선이 살 법한 영험한 터"라며 가문의 영광을 찬미하는 연작시가 새겨져 있었다.
귀후재 우측으로 길게 뻗은 돌계단을 밟고 올라 산자락에 다다르니, '高麗左丞相 朱公 餘慶之墓(고려좌승상 주공 여경지묘)'와 '貞慶夫人 金海金氏(정경부인 김해김씨)'의 비문이 좌우 석조 문인석을 거느린 채 위세를 자랑하듯 우뚝 서 있었다. 그 비문 앞에 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에도 나는 동면에서 주여경의 후손을 직접 마주하는 인연을 얻었다. 후손이 들려준 집안의 내력은 이러했다. 주자(朱子)의 4대손 '주잠(朱潛)'이 고려 말,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이 땅에 내려왔다고 한다. 그 아들이 바로 진등산에 잠든 주여경이요, 딸은 능주 구씨 가문에 출가하였으니, 두 성씨가 본디 한 남매의 후손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구씨와 주씨는 서로 혼인을 맺지 않는 풍속이 전해온다 하였다.
본래 주여경의 이름은 '주여(朱餘)'였다고 한다. 주자의 5대손으로 태어난 그는 중국 휘주부 신안현에 뿌리를 둔 집안 출신이었는데,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의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곧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다"는 경전의 구절에서 '여경(餘慶)' 두 글자를 따와 스스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하니, 그 이름 석 자에는 새 땅에서 다시 선을 쌓아가겠다는 먼 조상의 염원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던 셈이다.
그 도도한 문구들 앞에 서서, 나는 치안을 담당하는 한 사람의 경찰관으로서 여러 생각에 잠겼다. 귀후재의 뜻과 주련의 내용, 그리고 오늘 만난 후손의 자긍심 어린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120년 전 고백서 속 이기만의 절규가 함께 떠올랐다. 같은 시대, 같은 산자락 아래서 한쪽은 이토록 존귀하게 기억되는데, 다른 한쪽의 사연은 어찌하여 그리 쓸쓸히 잊혀갔을까. 이기만의 고백서 속 정황이 사실이라면, 선을 쌓으면 경사가 남는다던 그 경전의 가르침도 무색하게, 이웃한 이씨 문중에게는 오랜 다툼과 아픔으로 남았던 셈이다. 조상을 극진히 모셔 마을의 덕을 두텁게 하겠다던 숭고한 문구 뒤편에서, 명당에 대한 오랜 집착이 이웃 민초의 가슴에도 눈물을 남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옛 시절 명분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새삼 되짚어보게 되었다.
현장에서 만난 60대 후반의 우평 마을 이장은, 남평 이씨의 선산이었던 이 진등산 자락이 워낙 명당터인 탓에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혈자리에 박아 두었던 쇠말뚝을 훗날 후손이 찾아냈다는 이야기와, 이곳이 화순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억울함을 호소했던 남평 이씨의 묘는 오늘날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반면, 그 시절 분쟁의 중심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주씨의 묘역은 세월이 흘러 향토문화재로 지정·보존되어 있었다. 두 집안의 엇갈린 오늘 앞에서 내 가슴 한구석에는 묵직한 소회가 밀려왔다. 유구한 가문의 내력과 역사적 상징성을 보존하는 일도 물론 필요하겠으나, 문중의 사적 유산에 가 닿는 행정의 시선과 공공의 보살핌이 과연 어디에 먼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자꾸만 되돌아왔다. 국가와 지자체의 한정된 역량은, 마땅히 하루하루의 삶이 버겁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의 눈물을 닦아내는 곳에 먼저 스며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산자락에 허망하게 꺾이고 부러진 채 누운 고목은 세월과 세력의 흐름 속에서 조상의 자취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밀려난 이들의 서글픈 초상 같았고, 제각 입구에서 수백 년의 비바람을 견디며 당당히 위세를 뽐내는 푸른 은행나무는 그 터를 굳건히 지켜낸 세월의 흔적을 대변하는 듯하여, 오래도록 마음에 그늘을 남겼다.
이 준엄한 역사의 대조 앞에서, 나는 지나온 37년 여의 공직 생활을 고요히 되짚어본다. 나는 과연 이 땅의 민초들의 삶을 얼마나 따뜻하게 돌보았을까. 주민의 안전을 지키고 억울함을 바로잡기 위해 치열하게 달려왔다 자부하면서도, 정작 법의 사각지대에서 소리 없이 눈물 흘리던 약자들의 응어리를 놓치지는 않았는지, 묵직한 회한이 밀려온다.
다산이 형벌 하나를 정할 때조차 "삼가고 또 삼가라" 일렀던 것은, 결국 힘없는 자의 목숨과 억울함을 소홀히 다루지 말라는 당부였을 것이다. 진등산의 묏자리 하나를 두고도 관청은 끝내 그 '흠흠'의 자세로 시비를 명확히 가르지 못했고, "거짓 아닌 것이 없다"던 한 사람의 외침은 결국 지면 위의 활자로만 남았으며, 그 무게는 고스란히 힘없는 이들의 몫으로 남았다.
이제 제복을 벗을 날도 몇 개월 남지 않은 이 시점, 내 손에 쥐어진 1906년 1월 13일 자 상소장과 눈앞의 풍경, 그리고 오늘 우연히 마주한 주여경 후손의 이야기까지, 이 모든 인연은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걸어가야 할 무거운 이정표를 던진다. "지방관의 힘이 미치지 못해 주민이 눈물 흘리게 하지 말라" 120년 전 이기만 선생이 남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엄중한 명령이다.
1965년생인 나는 오늘도 옛 철장 땅, 지금의 우평 마을 어두운 골목길과 관내 구석구석을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비출 것이다. 힘의 논리에 정의가 왜곡되지 않도록, 공공의 따스한 손길이 강자의 위세가 아닌 가장 낮고 어두운 곳의 눈물을 닦는 데 먼저 쓰이도록. 열대야의 무더위 속에서도 120년 전 신문 속에 한 맺힌 절규를 묻어야 했던 민초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이 땅의 진짜 정의와 평온을 '흠흠'의 마음으로 지키고 있노라 답하고 싶다.
2026. 7. 31. 만연산 자락 흥유산방에서 흥유 순종